공짜폰·로밍서비스 도입에도 장밋빛 전망은 그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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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28면

이리듐(iridium)이라는 희귀 원소가 있다. 원자번호 77번인 이 금속은 공룡의 멸종 원인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거론된다. 전 세계적으로 공룡 화석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지층에 지각보다 30배 많은 이리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리듐은 운석이나 화산 폭발 지역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그래서 거대한 운석의 충돌이나 대규모 화산 폭발 같은 천재지변 때문에 공룡이 멸종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실패에서 배우는 경영 글로벌 이동통신서비스 ‘이리듐’의 몰락 ②

공룡 멸종 이후 수만 년이 지난 1999년, 이리듐이라는 이름은 또 다른 공룡 몰락의 드라마에 다시 등장한다. 비운의 글로벌 위성전화 서비스인 ‘이리듐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리듐은 780㎞ 상공의 저궤도에 쏘아 올린 통신위성들을 이용해 전 세계를 하나의 통화권으로 묶는, 최초의 범세계 위성휴대통신(GMPCS·Global Mobile Personal Communication by Satellite) 서비스다. 이리듐이라는 사업 명칭은 당초 쏘아 올릴 계획이던 77개의 위성 숫자(실제 발사된 위성 수는 총 72개)와 이리듐의 원자번호(77)가 일치하는 데서 착안했다.

새로운 위성통신 시대의 도래를 알렸던 이 첨단사업은 1989년 미국의 모토로라를 주축으로 하는 이리듐사(Iridium LLC)에 일본·러시아·대만·중국·한국 등 세계 47개 주요 통신기업들이 가세하면서 시작됐다. 총 50억 달러가 넘는 사업비가 투자된 초대형 글로벌 프로젝트다. 이동통신 서비스 시장에 거대 공룡이 등장한 셈이다.

이리듐의 가장 큰 장점은 말 그대로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휴대 단말기를 통해 음성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보편적인 아날로그 셀룰러(무선전화) 방식의 통신망으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독보적인 경쟁 우위 요인이었다. 또한 기존 고위도 위성통신과는 달리 파라볼라 안테나 등 복잡하고 무거운 부수 장비가 필요 없었다. 운송 수단이나 도로 같은 인프라를 갖추기 어려운 오지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존 위성통신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극지방 통화 불능 현상도 극복할 수 있었다. 적어도 성능 면에서는 확실히 진보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 첨단 이동통신 서비스가 분명했다. 이 때문에 모토로라는 먼저 위성망이 구축돼야 한다는 작지 않은 부담에도 이리듐 서비스의 기술적 우위와 이에 기반한 상업적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출범 전부터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98년 11월 서비스가 시작된 후 실가입자 수는 5만 명 수준에서 정체됐다. 채무 부담이 가중됐고, 결국 이리듐사는 재정적 위기에 몰리게 됐다. 그 결과 서비스 개시 후 채 1년이 안 된 99년 8월, 44억 달러 상당의 부채를 갚지 못하고 자발적 파산을 신청했다. 이후 2001년 보잉사에 단돈 2500만 달러에 매각됐다. 총 94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손실을 입고 이리듐 서비스는 마치 그 옛날 공룡의 운명과 흡사한 모습으로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리듐의 충격적인 실패는 모토로라는 물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통신기업에 적잖은 손실을 안겼다. 그러나 실패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참여 기업들은 모토로라의 신사업 독점을 막기 위해, 또는 경쟁 체제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씻기 위해 불확실한 길에 뛰어들었다. 사업 타당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기초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은 뒷전이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모토로라에 있다. 사실 이리듐은 사업 구상 초기부터 적지 않은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토로라는 애써 이를 간과했다. 이 회사는 87년 이리듐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 검토에 착수한 후 타당성 분석을 거쳐 89년 사업 추진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시장성 논란이 제기됐다. 기술 주도권이 디지털 셀룰러 방식으로 넘어갈 것이 명백한 이동통신 서비스 산업의 흐름을 감안할 때, 과연 이리듐이라는 신규 서비스가 얼마만큼 시장에서 먹힐 수 있는지에 대해 냉철하고 전략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토로라는 시장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예측을 외면하고 낙관적으로 포장된 전망만을 좇아 사업 추진을 결정했다.

사업 진행 속도도 문제였다. 투자 결정 시점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실제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미 시장 상황은 사업 추진 초기와는 다르게 변해 있었다. 이리듐 개발에 착수할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는 고가품이었다. 이리듐도 비싸기는 했지만 그 효용성을 감안하면 휴대전화와 비교해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디지털 휴대전화와 PCS 서비스가 순식간에 아날로그 시장을 대체했다. 기존 지상 기지국을 이용해 글로벌 음성통화가 가능한 로밍 서비스가 등장했다. 게다가 사용 기간 약정에 따른 무료 단말기와 저렴한 요금제에 익숙해진 소비자에게 대당 3200달러나 하는 이리듐 전용 단말기 가격은 큰 부담이었다. 분당 4~7달러에 이르는 사용 요금은 납득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크게 보면 이리듐 몰락의 원인은 사업 계획에 대한 과대 평가와 대체 기술에 대한 과소 평가의 결과로 요약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시티폰(CT-2)이 그렇다. 무선호출기 시장의 급성장에 취해 그 미래를 과신한 일부 사업자들이 호출기와의 상호 보완성이라는 이점에 주목해 시티폰 서비스를 돛沌杉�. 그러나 디지털 기반의 PCS 시장이 이미 열린 상태에서 통화 품질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데다 발신 전용이라는 사용상의 제약까지 있는 ‘반쪽짜리’ 단말기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게다가 시티폰은 과거에 유사 서비스가 영국·프랑스·대만 등에서 이미 실패한 적 있다는 점은 무시했다. 시티폰은 2000억원에 달하는 투자 비용을 고스란히 날렸을 뿐 아니라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에 집중했어야 할 기회비용까지 이중으로 잃는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며 역사에서 사라졌다.

21세기 산업 환경은 끊임없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어떻게 시장이 변화하는지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판단을 내렸다가는 즉각적으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과거의 화려한 성공은 과거일 뿐이다. 현실과 미래의 변화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해 의사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일등 기업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수만 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도, 50억 달러를 투자한 글로벌 초대형 프로젝트 이리듐도 지금은 지구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업들은 미래를 주시하고 변화에 적극 대응해 경쟁력을 키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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