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기업은 스스로 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지난 23일 취임한 김동선 중소기업청장이 한 얘기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해를 사기에 딱 좋은 말이다. 중소기업이라면 당연히 보호와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박힌 우리나라에서 명색이 중소기업청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으니 오해를 살 만도 하다.

그는 중소기업청장이 되기 전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으로 있을 때부터 “중소기업 지원정책을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면서 “지원 기업에 대한 평가와 사후관리를 강화해 나눠먹기식 관행을 근절하겠다”고 했었다. 그동안 중소기업에 대해 펴온 정부의 지원정책이 오히려 중소기업의 성장을 막고 고용을 늘리는 데 걸림돌이 돼왔다는 판단에서다.

지원 제도의 가짓수나 지원 규모만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진작에 중소기업의 천국이 되었어야 마땅하다. 각종 세제혜택은 물론, 금융 지원과 인력 지원에 이르기까지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런 지원을 받고도 우리나라가 중소기업의 천국이라는 얘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마다 들고 나오는 공약의 단골메뉴로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이 다시 나온다.

사실 국내 기업체 수의 99.9%를 차지하고, 종업원 수의 85%를 담당하는 중소기업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중소기업기본법상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중소기업은 ‘(제조업 기준으로) 자본금 80억원 이하, 또는 종업원 300명 이하’로 묶여 있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려면 무언가 기준이 있어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만든 잣대이긴 하지만 그 잣대가 중소기업이 더 이상 크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됐다는 게 문제다. 기업이 커져 중소기업 기준을 넘어서면 모두 대기업으로 분류돼 그동안 받아왔던 지원과 혜택이 한꺼번에 끊기니 기업을 키울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다. 몸집이 커지면 그에 걸맞게 큰 옷을 새로 해입혀야 할 텐데 아예 옷을 벗겨버리니 몸을 작은 옷에 맞추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중소기업을 졸업해도 3년간 기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유예제도를 도입했지만 그 3년이 지나면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알 만한 알짜기업인 S사는 창립 이래 지금까지 종업원 수를 298명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300명에 딱 맞추자니 남세스러워 두 명을 줄였다는 웃지 못할 사연이다. 또 다른 편법도 있다. 성장 속도로 보면 중소기업을 넘어서 더 큰 무대로 나가 경쟁해야 할 기업이 회사를 쪼개 중소기업으로 남는 것이다. 이런 기업들은 당연히 경영의 비효율로 인해 발전의 추진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판에 투자와 고용이 늘어날 리 만무하다.

1997년 중소기업이었던 기업 가운데 2007년까지 중소기업을 졸업하고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119개사에 불과하다. 또 같은 기간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28개사로 이 가운데 기존 대기업 계열사와 외국인 투자회사를 빼면 풍산·오뚜기·이랜드 등 3개사뿐이다. 중소기업 기준과 그에 따른 지원책이 중소기업을 키워 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시키기는커녕 성장을 포기하고 영원히 중소기업에 안주하도록 하는 병목 역할을 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들고 나온 대안이 지난 18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나온 ‘전문 중견기업 육성 전략’이다. 중소기업을 졸업하면 갑자기 지원이 뚝 끊기지 않도록 현행 중소기업 졸업 유예기간 3년에 추가로 5년간 단계적으로 부담이 늘어나도록 완화기간을 준다는 것이다. 또 성장 잠재력이 큰 중견기업에 대해 특화된 마케팅과 인력·기술 지원을 통해 2020년까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300개 이상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내놨다. 일단은 기존의 중소기업 지원 제도의 단절 효과를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약발이 듣는 정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의 규모를 잣대로 삼은 정부의 지원이나 규제 정책은 근본적으로 기업의 자율적인 경쟁과 자발적인 성장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새로운 기준을 만들면 기업은 그 기준에 맞춰 가장 유리한 형태로 적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기업의 규모에 따른 차등을 단계적으로 없애 모든 기업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법이다. 기업은 정부의 지원으로 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성장한다.

삼성전자 사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벤처기업투자회사를 운영하는 진대제 대표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최근 ‘중소기업 성장전략’에 관한 강연에서 “국가가 중소기업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세금 감면 같은 유인책은 일시적인 진통제에 불과할 뿐 그것으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업가 스스로 피나는 경쟁을 통해 기업을 키우라는 것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