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위상 지키기 초점 … 제도 손질에만 그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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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이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청사에서 퇴근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25일 대법원이 발표한 사법제도 개선안은 지난 18일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이 발표한 성명의 연장선 위에 있다. “사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심마저 잃었다”는 성명 내용대로 ‘사법부의 위상’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편향 판결’ 논란 이후 제기된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노력 대신 기존의 재판·인사 시스템을 손질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내부용’이란 지적도 받고 있다.

한나라당 안의 핵심은 대법관 증원과 법관인사위원회 개편이었다. 현재의 대법관 수(14명)로는 무더기로 쏟아지는 상고사건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대법관 수를 크게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에 맞설 카드로 고등법원의 상고 심사부를 들고 나왔다. 상고 심사부에서 상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할 경우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리’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는 얘기다. 대법원 측은 “미국과 영국의 대법관 수가 각각 9명, 12명”이라며 “로스쿨 도입 등으로 사법제도가 영미식으로 가고 있는데 상고심만 독일과 같은 대륙식으로 가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상고 심사부 설치로 사실상 4심제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재판 기간 연장 등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서울변호사회 김현 회장은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을 피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생소한 안을 낸 것 같다”며 “대법관이 늘면 위상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김두현 전 대한변협 회장 등 법조 원로 10여 명도 이날 변협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법관인사위원회 개편의 경우 인사권이 지나치게 대법원장에게 집중돼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법관인사위원회 개편에 관한 언급 없이 법관 연임 심사를 강화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법관의 내부적 독립 침해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유의하겠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한나라당 안대로 법무부 장관 등이 추천한 외부 위원들로 인사위를 구성할 경우 판사들이 정부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등 법원 내 사조직 활동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종래 추상적·선언적이던 법관 윤리강령을 구체화한 법관 윤리장전을 만들겠다”고 밝히는 선에서 그쳤다. 다만 변호사 업계가 줄기차게 요구해 온 판결문 공개에 대해선 기존의 ‘반대’에서 ‘수용’ 입장으로 돌아섰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상고 심사부 설치도 논란의 대상이긴 하지만 이것 말고는 눈에 띄는 대책이 없다”며 “한나라당 개선안이 입법화되기 전에 자체 개선안을 내느라 서두른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앞서 한나라당은 지난 24일 사법개혁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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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측은 이날 “우리 개선안이 한나라당 안과 함께 심도 있게 논의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 개정 과정에서 여당과 야당, 대법원이 절충을 통해 접점을 찾지 못할 경우 제2, 제3의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큰 상태다.

글=전진배·이현택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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