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학자들, 식민사관 ‘가지’는 자르고 ‘뿌리’는 유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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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이제 폐기해도 좋은가. 23일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발표의 겉만 보면 그렇다. 위원회는 고대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을 일본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더 이상 실효가 없음을 공식화했다. 임나일본부설의 ‘용도 폐기’를 선언했다. 의미가 적지 않다. 제1기 위원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실체를 들여다보면 크게 반기고 있을 일만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임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설’ 왜 문제인가=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식민사관의 중심축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로 활용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100년 전 일제 침략기에도 그랬다. 한반도는 본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을 일본 학계에선 ‘임나 지배설’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임나 지배설’은 198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 부정돼 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일본 교과서와 개설서에 반영이 안 됐을 뿐이다. 2005년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의 도발적 왜곡을 제외하고 드러내 놓고 ‘임나 지배설’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임나일본부설’의 부적절함을 한목소리로 지적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일 고대사에 대한 양국의 이해가 좀 더 깊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 보면, 용어의 부적절함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이야기된 것이므로 새로울 것도 없다. 다만 양국의 대표적 학자가 이를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향후 일본의 교과서에 반영되길 기대할 만하다.

◆근거는 뭔가=일본 측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일본서기』와 중국 만주에 위치한 광개토대왕 비문을 인용해왔다. 비문에는 일본 측이 ‘임나’로 해석하는 글자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왜군이 가야에 진주하며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일본의 식민사관이 형성됐다.

한국 학계에선 대체로 임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왔다. 요즘은 임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일본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도 확산되고 있다. 홍익대 역사교육과 김태식 교수가 후자를 대표한다. 임나가 존재했지만 그 기능은 왜 출신 관리나 외교관의 거처였다는 해석이다. 이번 제2기 위원회에서 일본 측은 지금의 경남 함양 땅에 왜인들의 집단촌이 형성돼 있었다고 보았다. 왜인의 거주 흔적은 인정하면서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까지는 하지 않았다. 또 일본이 가야를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기존의 시각은 재검토와 정정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내놨다. 김태식 교수의 주장과 접점을 찾을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일본 고대사 우위설’로 문제 이동=이번 발표에 우리가 유의할 대목이 있다. 일본 학계의 논점이 이동하는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요즘 일본 고대사는 ‘일본 고대 왕권 우위설’에 집중되고 있다. 고대 한반도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분열됐던 것에 비해, 당시 일본은 강력한 단일정권(야마토 정권)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단일국가 일본이 정치·외교적으로 우위적 입장에 있었고, 고구려·백제·신라 3국이 일본과 경쟁적으로 교류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고대사 우위설’의 지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측이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의 문제점을 양국 공동으로 제기한 것은 작은 것(임나일본부설)을 내주고 큰 것(고대사 우위설)을 유지·확대하는 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극단적 주장은 폐기하면서 근본적 쟁점은 간직한 셈이다. 실제로 현재 일본 고대사 학자 가운데 일본의 가야 지배설을 주장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일본의 극우파 후소샤판 교과서 등 일부가 마치 정설처럼 기록해 문제가 됐다. 일본 측은 ‘고대사 우위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도 광개토대왕 비문과 『일본서기』를 그대로 활용해왔다.

제2기 한국 측 위원이었던 김태식 교수는 “극단적 식민사관인 ‘임나일본부설’ 혹은 ‘임나 지배설’은 폐기됐지만,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는 근본적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학계의 대응이 필요한 대목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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