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장인이 와인잔까지 만든다, 일본 전통공예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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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일본 이시카와현의 현청이 있는 중소도시 가나자와(金澤)엔 47만 명이 산다. 한데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은 한 해에 700만 명이나 된다. 그렇다고 관광도시는 아니다. 이 도시를 일러 ‘공예도시’라고 한다. 금박·염색·도자기 등 일본의 전통공예를 300여 년 동안이나 고스란히 계승하고, 전통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공예 분야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19개 창의도시 중 공예도시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전통공예를 계승해 상품을 만들어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공예도시. 공예산업의 선순환을 보여주는 이 도시를 찾았다. 풍부한 물과 숲이 있고, 운이 좋아 전쟁의 피해를 본 적이 없지만 가나자와가 전통 공예를 이어나간 건 우연이 아니었다.

쓰이지 않는 공예품은 만들지 않는다

유리공예가 쓰지 가즈미(46)의 작업장은 가나자와성 인근 포도밭 옆에 있다. 실내로 들어서자 용광로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훅하고 몰려왔다. 쓰지가 쇠막대 끝에 녹아 엉겨붙은 규사(硅沙)를 반대쪽에서 입으로 불자 말랑말랑한 유리가 조금씩 부풀었다. 물에 젖은 신문지 위에 벌건 유리를 둥글리자 조금씩 잔의 형태가 잡혔다.

17세기 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나자와 금박(金箔)으로 만든 공예품. 2g 정도의 금 알갱이를 두드려 1만 분의 2㎜ 두께까지 펼친다. 가나자와는 일본 금박의 98%를 생산한다. [가나자와 시청 제공]

쓰지는 일본에서 15 차례나 작품전시회를 연 인기 작가다. 인기의 비결은 단순하다. 실생활에 쓸 수 있는 상품만 만들어서다. 그는 “공예품은 그것을 쓰는 사람과 만나야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을 졸업한 뒤 3년 동안 미국에서 유리 공예를 배웠고, 이탈리아 밀라노의 유명 디자인 회사 마테오 튠 스튜디오에서 일하기도 했다. 짧은 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나자와에서 동료들이 추상적인 작품을 쏟아낼 때 실용적인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또 작업장 멀지 않은 곳에 카페와 갤러리를 열었다. 커피를 자신이 만든 잔에 담아 내놓고 그 잔을 2층 갤러리에서 판다. 가나자와 주류제조업체 후쿠미쓰야(福光屋)의 ‘사케숍’에도 자신의 공예품을 전시한다.

전통 공예도 늘 혁신 중이다. 지역의 전통 염색 공예가들은 새로운 색상과 디자인을 적용한 결혼 예복을 개발했다. 와인이 유행하자 도자기 공예가들은 와인잔을 만들어 지역 상점에서 팔기 시작했다. 이런 혁신은 공예가들만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니다.

시민들은 지역상공회 중심으로 지역개발운동을 펼쳐 못 쓰는 공장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공방이 늘어나자 공예가들의 창작 환경이 나아졌고, 이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시의 정책도 뒷받침됐다. 공예가들이 자극을 받도록 1989년 가나자와 국제 예술공예대회를 열어 해외 공예품을 불러들였다. 97년부터는 공예도시 세계회의를 만들어 피렌체·코펜하겐·이스탄불 등의 장인을 초청했다. 새롭게 전통 공예 산업에 뛰어드는 이들에게는 매달 10만 엔씩을 3년간 지원하는 ‘당근’도 활용했다.

예술하기 쉬운 도시, 안목 높은 시민들

1 유리공예가 쓰지 가즈미가 만든 유리잔. 2 우타쓰야마 공예공방에서 연수 중인 한 외국인이 도자기를 빚고 있다. 3 옷감에 색을 칠해 화려한 문양과 빛깔을 내는 가나자와 특산 염색 공예인 가가유젠(加賀友禪) 채색 작업. [쓰지 가즈미, 우타쓰야마 공예공방,가나자와 시청 제공]

가나자와 산자락엔 ‘우타쓰야마(卯辰山)공예공방’이라는 곳이 있다. 시민들을 위한 공예교육과 공예 전문가들의 재교육까지 시키는 공예전문 교육기관이다. 20년 전 문을 연 이곳에선 매년 500여 명의 시민이 공예를 배운다고 했다. 시민들도 한두 가지 공예는 예사로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진정한 공예도시 창조기지인 셈이다. 머리 희끗한 노인들이 젊은 선생에게 물어가며 손수 만든 유리잔에 끌로 무늬를 새기는 모습, 도자기를 만들고 칠공예를 하는 평범한 시민의 모습은 이 공방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칠(漆) 작업실에서 만난 바스티앙 룰랑(Bastien Ruhland·25)은 칠을 배우러 프랑스 낭시에서 넉 달 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가나자와의 시민들은 공예를 보는 감각이 높다”며 “에르메스 등 프랑스 업체들도 가나자와의 공예를 보러 온다”고 말했다. 공방은 매년 해외에서 10여 명의 학생을 받는다.

이곳만이 아니다. 가나자와 시내 한복판엔 시민들이 예술을 즐기고 배울 수 있는 곳이 도처에 널려 있다. 2004년 세워졌다는 가나자와 21세기미술관은 팬케이크처럼 둥그런 건물의 벽면을 모두 통유리로 해놓았다. 안에서 밖이, 밖에서 안이 그대로 들여다 보인다. 바쁜 사람은 길거리에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만큼 예술을 개방한 것이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거나 전시실을 빌려 자신만의 작품전을 열기도 한다.

시는 오래 방치됐던 공장을 시민들을 위한 예술공간으로 만들기도 했다. 9만5000㎡ 규모의 낡은 방직공장을 뜯어 고쳐 1996년 문화공간으로 새로 연 ‘시민예술촌’에는 오후 무렵이면 시민들이 몰려든다. 오사카시립대 사사키 마사유키 교수는 “예술을 쉽게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안목이 높아진 시민들은 좋은 공예품을 구매한다. 결국 공예가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윈윈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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