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은 준비된 장기 구호활동 … 한국도 국가차원 지원체계 갖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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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구촌 곳곳의 대형 참사 현장에서는 늘 세계 각국의 의료진이 땀을 흘린다. 한국 의료진도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선진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선진국은 준비에서부터 구호까지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최근 아이티 구호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대 의대 권용진(40·사진) 교수는 “수요자보다 공급자 위주의 의료봉사 방식이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며 ‘자기 만족식’ 봉사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권 교수는 대한적십자사·대한의사협회의 4차 의료봉사단으로 아이티를 다녀왔다. 2004년에는 쓰나미 의료 봉사에도 참여했다.

-선진국과 한국 봉사진의 차이는 뭔가.

“선진국 봉사단원들은 유엔이나 전문기관, 국제적십자연맹에서 ‘긴급구호 대응 체계(ERU)’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선진국 봉사진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3년 이상 머문다. 우리처럼 1주일 정도 있는 데는 거의 없다.”

-어떤 나라가 잘하나.

“독일적십자사는 100병상의 야전병원을 운영한다. 여기에 독일·홍콩·캐나다 등 13개국에서 온 18명의 의료진과 현지에서 고용한 아이티 의사와 간호사들이 근무한다.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 치료실과 전염병 예방센터가 있다. 몇 년 뒤 현지에 정식 병원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도 3~4명의 의사가 남아서 현지 의료진을 고용해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6개월 정도 있을 예정이다. 한국 의료진은 대부분 철수했다.”

-철수할 때 기분이 어땠나.

“국제적십자연맹에서 ‘더 있어 달라. 왜 자꾸 의료진이 1주일마다 바뀌느냐’고 물었다.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부끄러웠다.”

-진료의 수준은 어땠나.

아이티에 파견된 대한적십자사·의사협회 봉사단 소속 의료진이 영양 실조로 탈진 증세를 보이던 갓난아이에게 영양제가 든 수액을 먹이고 있다. 아이 엄마는 지진 때 숨졌다. [권용진 교수 제공]

“독일이나 노르웨이는 수술실과 검사장비를 갖춘 이동병원을 들여와 어려운 시술도 했다. 우리 의료진은 대부분 전문의가 갔지만 실제로는 감기나 배탈, 간단한 외상 치료 등의 1차 진료를 했다. 약품과 간단한 외상처치 기구만을 갖고 갔기 때문이다. 남은 약품은 사용설명서가 한글로 돼 있어 현지에 기증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이 가지 않았나.

“대형병원과 종교단체 등에서 의료진을 파견했다. 숫자로 치면 아마 세계에서 가장 많을 거다. 차비만 계산해도 의료진당 2500만원(항공료 등 교통비 1인당 250만원씩 10명)이다. 한 달 이상 있으면 효율이 훨씬 올라갈 것이다. 이번에 10개가 넘는 봉사단이 아이티에 갔다. 갑자기 꾸린 데가 많다.”

-인도네시아 지진 때와 달라진 게 있나.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로 갈 때 한국 의료진 100여 명이 총리 전용기로 갔다. 이번에는 10여 개 팀이 따로따로 갔다. 인도네시아에서 진료 장소를 확보하지 못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어떤 팀은 출발 전에 장소를 확보해 놓고 갔으나 현지에서 다른 팀이 가로채간 경우도 있다. ”

-어떻게 바꿔야 하나.

“국가 차원의 긴급구호 지원체계를 갖춰야 한다. 시설과 장비를 미리 마련하고 전문인력을 키워야 한다. 이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일이 터지면 즉각 달려가야 한다. 이와 함께 대한적십자사가 ERU에 가입해야 한다고 본다. 봉사가 끝나면 의료기기나 장비를 현지에 기증하는 게 관례인데 적십자사는 이런 비용이 ERU 가입의 걸림돌이라고 한다.”

권 교수는 전북대 의대를 나와 의료전문지 ‘청년의사’ 전략기획실장, 대한의사협회 사회참여 이사 겸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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