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피나 바우슈 ‘봄의 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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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봄의 제전’은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21일까지 공연된 피나 바우슈의 ‘봄의 제전’. 무대 한 가득 깔린 붉은 색 흙은 낯설었다. 흙의 이미지인 고향, 자연, 따뜻함 등과 거리가 멀었다. 무용수들은 그 흙을 거침없이 밟았고, 그 위에서 뒹굴었다. 객석까지 흩뿌려지는 흙, 불안했다.

공연의 또 다른 핵심은 빨간 천. 그 천을 갖게 된 자는 자기 목숨을 하늘에 바쳐야 한다. 천은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한 명이 희생돼야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 누가 십자가를 지려 하겠는가. 모두들 회피하고, 떠넘긴다. 마침내 제사장이 한 여성을 택하자, 그 여성은 억울함에, 절망감에 몸부림친다. 그를 훔쳐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엔 안도와 죄책감이 교차한다. 그저 춤을 추건만 거기엔 묵시록적인 엄혹함이, 사건의 긴박함이, 그리고 인간 이중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었다.

‘마주르카 포고’ ‘러프 컷’ 등 2000년대 들어 적지 않은 바우슈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관객들은 버거워했다. 명성은 익히 알건만, 피카소의 추상화를 보듯, 난해한 움직임과 맥락에 그저 주눅들어 했다. 이날은 달랐다. 작품에 어떤 숨겨진 요소가 있을지언정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뿜어내는 에너지에, 숨을 헐떡거리며 거칠게 포효하는 역동성에, 맞춤 옷처럼 착착 떨어지는 음악의 절묘함에 탄성을 자아낼 뿐이었다. 안무가 신창호씨는 “군무·솔로간의 밸런스 등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은 현대 무용의 모든 게 녹아 있다”라며 극찬했다.

바우슈는 35년 전에 ‘봄의 제전’을 만들었다. 지난해 암 선고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난 그가 새삼 안타까웠다. 유독 한국과 친숙했던 바우슈. 이제서야 자신의 초기 작품을 들고서 우리 관객에게 말을 건네오는 걸까? 객석에선 기립박수가 터졌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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