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책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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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고 이듬해 과거를 치렀다.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몰릴지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 많고 적음으로 해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새 왕조를 지지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어서였다.

과장(科場)은 썰렁한데 맞은편 언덕을 넘어가는 한떼의 선비들이 있었다. 두 왕조는 섬길 수 없다며 두문동 산골로 들어가는 '두문동 72현(賢)' 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때 두문동에 들어간 현자들은 73명이었다. 누군가는 의지할 데 없는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며 한명은 내려보냈다.

그가 세종대에 태평성대를 가져온 황희 정승이다. "무엇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했으며, 정승으로 몇십년을 지내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일이 허다할 정도로 검소했다" 고 『조선왕조실록』은 황희의 사람됨을 적고 있다

최근 나온 『제왕들의 책사』라는 책이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책사(策士)란 남을 도와 일을 꾸미는 사람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왕을 도와 일을 꾸며 좋은 결과를 가져와 칭송 받거나 혹은 죽임을 당한 책사 21명의 성공과 좌절을 다룬 이 책에서 독자들은 오늘의 정치현실에 그들을 올려놓으며 재미와 교훈을 얻고 있는 듯하다.

황희가 90이라는 천수를 누리며 명재상으로 추앙받았다면 조광조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그를 아꼈던 중종에게 사약을 받았다.

"대사간의 중책을 맡은 자로서 상소자를 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한 중죄를 받아 마땅하다" 고 대사간 이행을 탄핵하며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된다.

유생들을 탄압하며 언로를 막은 연산군에게 등 돌린 민심이 중종반정의 명분. 그 명분도 살리고 반정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중용한 것이다.

한번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선 좌우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며 개혁 정책을 펴나가던 조광조는 반정공신들의 모함에 빠지게 된다.

모함인 줄 뻔히 알지만 중종은 자신의 앞에서도 굽힘 없이 제 뜻을 관철하는 조광조를 제거한 것이다.

오로지 백성을 위했던 황희와 원칙과 명분에 충실했던 조광조의 말로는 이처럼 정반대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민주당 지도부에 "국민의 어려운 점과 사는 모습에 대해 심층적인 의견을 나누는 것이 좋겠다" 고 밝혔다. 일을 도모하되 국민 편에서 꾸미라는 주문일 것이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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