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텍사스촌' 접대부 금발이 휘어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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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요즘 부산시 동구 초량동 속칭 '텍사스촌' 밤 풍경이 과거와 확 달라졌다.

○○노래주점.××호프집.△△클럽 등 어지럽게 간판이 늘어선 모습은 예전과 다름 없지만 그 앞에 진을 치고 호객하는 사람들은 모두 금발의 이국 여성들이다.

이들은 진한 화장을 하고 향수 냄새를 풍기며 행인들에게 다가와 제법 유창한 한국말로 "한잔 하고 가세요" "예쁜 아가씨 안에 많이 있어요" 라며 유혹한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인들. "부산에 두번만 갔다 오면 러시아에서 몇년간 일해야 만질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 는 말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지방과 멀리 모스크바에까지 퍼지면서 러시아판 '코리안 드림' 을 안고 한국에 온 여성들이다.

최근 이들 러시아 여성들은 과거 한국 여성들이 미군을 상대로 영업했던 텍사스촌을 완전히 장악했다.

텍사스촌에 있는 단란주점 30여곳, 호프집 20여곳, 레스토랑과 클럽 10여곳 등 60여곳에서 업소당 10~20명씩 접대부나 '삐끼' 로 일하고 있다. 한 업소 주인은 텍사스촌에서 일하는 러시아 여인이 줄잡아 8백~1천명은 된다고 말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카페에서나 한두명씩 보이던 러시아 여성들이 지난해부터 부쩍 늘어 이제는 텍사스촌에서 한국 여성 접대부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이들의 호객행위는 한낮에도 흔하게 벌어진다.

이들의 주 수입원은 술시중을 들고 받는 팁. 한 자리에서 5만~7만원의 팁을 받아 하루에 두세번씩, 한달에 2백만원 정도를 번다. 일부는 매춘을 통해 고수입을 올린다는 것이 업주들의 말이다.

이곳의 한 주점에서 만난 회사원 金모(43)씨는 "이국적인 분위기에다 술값과 팁이 우리나라 룸살롱의 절반 수준이고 서비스도 좋아 접대나 직원 모임 때 가끔 들른다" 고 말했다.

상당수가 대학 졸업자인 러시아 여성들은 우리말과 영어를 제법 잘해 손님들과 의사소통에도 큰 불편이 없다. 이들은 한국의 술 문화에도 빨리 적응해 폭탄주를 돌리는데도 익숙해졌고 흥이 오른 후에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만남' 등 우리나라 노래를 막힘 없이 뽑아낸다.

부산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2000년 1월부터 지난 3월까지 관광.취업.유학 비자 등으로 김해공항과 부산항을 통해 입국한 러시아 여성은 4천5백44명.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사람을 포함하면 한해 5천~6천여명의 러시아 여성들이 부산으로 오는 것으로 관광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한 술집 종업원은 "러시아에서는 대졸 여성이 우리 돈으로 월 20만원 정도 밖에 벌지 못해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고 말했다. 이들의 비자기간은 1~3개월에 불과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현지 마피아들이 한국행 희망자들을 모집해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사업까지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산경찰청 공길용(孔吉溶)외사과장은 "텍사스촌에서 일하는 러시아 여성들의 입국 목적 위반행위에 대해 내사하고 있다" 고 말했다.

부산=정용백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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