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설악산 풍경 겨울·봄' 전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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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빠르고 힘찬 선이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유화물감을 두텁게 칠한 선들은 자유분방한 반추상의 배경을 이룬다. 굵은 선들은 때로 용틀임치면서 나무를 이루거나 폭넓게 이어져 바위와 산봉우리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나무와 꽃과 새가 보이는 설악산 풍경화는 예쁘지 않다.

화면이 정돈되지 않은 데다 장식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과 격정이 충만한 선들은 원근법을 무시한 분방한 화면에 깊이있는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

서울 청담동 박여숙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학-설악산 풍경 겨울.봄' 전이다(23일 까지). '설악산 화가' 로 널리 알려진 작가(64)의 신작 40점을 전시 중이다.

지병인 우울증을 벗어나 정신적으로 고양돼 있는 작가가 지난 2개월간 '폭풍처럼 몰아쳐서' 완성한 작품들이다.

"요즘은 그림이 잘 되고 재미있어. 화가다운 그림, 설악산 같은 그림을 그린다고 할 수 있지. 한 작가가 평생 베스트 작품 10점만 그리면 만족한다는데 이 중에 한 5점은 그런 것 같아. "

1998년 이후 3년 만의 개인전. 그러나 지난번 전시에 신작을 별로 못냈던 작가는 "7년 만의 근작전" 이라고 강조한다.

작 가는 경기고.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미술대학.미국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이름난 추상화가.미술품 수집가였던 그는 70년대 중후반에 미니멀 아트에 대한 회의와 결혼생활의 파탄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설악산 폭포에서 뛰어내리려고도 했지만 '화가로서 자식들에게 그림 1백점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다' 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79년에 설악산에 숨어들어간 작가는 81년부터 속초시 설악동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설악산은…나를 살렸다" 고 작가는 말한다.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을 휘젓고 다녀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들과 함께 '산 도깨비' 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산수유의 노란 자태를 바라보느라 넋을 잃는가 하면 산의 아름다움에 홀려 날이 저문 줄도 모르기 일쑤라고 한다.

생활이 바뀌면서 그림도 추상화에서 구상으로 선회해 설악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현란한 색채가 특징이다. 폭포를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꽃들, 흰 눈을 이고 있는 장엄한 봉우리, 온통 갈색으로 뒤덮인 가을산의 묵직함 등은 애호가들의 인기가 높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림이 막혀서 고심하다 갑자기 작업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폭포처럼 쏟아질 때가 있고 웅덩이처럼 고여 있을 때가 있다. 웅덩이가 어느 날 울컥거리며 넘쳐나듯 그림도 그렇다. "

요즘 작가는 행복하다. 오랜 모색과 기다림 끝에 이제야 화가가 된 듯하다는 것. "60 고개를 넘어서야 영혼을 감동시키는 그림이 뭔지 알았다" 고 말한다. 02-549-7574.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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