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리포트] 서울 최대의 달동네 신림동 '난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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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산꼭대기의 파란색 공동화장실.소방차가 올라갈 수 없는 평균 경사 35도의 골목길.주로 소주·라면만 팔리는 동네 가게.옛 삼성전자 로고가 남아 있는 1970년대식 거리 간판.아직도 두 집에 한 집꼴로 연탄을 쓰는 곳.여기는 2001년 4월,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101 ‘난곡’-.

본사 취재팀은 국내 최대 규모인 2천여 가구의 저소득층이 사는 이곳에 70여일간 머물며 빈곤 실태를 규명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조사 보도’를 벌였다.편집자

박순자(가명·86)할머니 일가에게 가난은 벗어나기 힘든,크고도 깊은 수렁이었다.증손자까지 4대 여섯 가구가 난곡에 살고 있는 朴할머니 일가.가족 29명 거의 모두가 최저생계비(3인 가구 기준·월소득 76만원)이하 생활자.네명 중 한명꼴로 중증 질환자다.

대졸자는 단 한명(손자),유일한 정규직 취업자다.한국전쟁 때 가난의 늪에 빠진 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이들은 저학력-저소득-노동력 마모라는 ‘사슬’에 걸려들었다.

취재팀은 ▶실업이 고착화하고 ▶근로 의욕이 감퇴하며 ▶장래에 대한 극도의 절망감이 번지는 등 ‘빈곤의 함정’이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난곡의 성인 남녀 2백명을 면접조사한 결과 1백19명(65%)이 97년 이후 단 한번도 직업(공공근로 제외)을 갖지 못했다.

특히 근로능력이 왕성한 20∼40대 중 62%가 4년간이나 실업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정부가 각종 자활·재취업 사업을 벌이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했으나 이들을 일터로 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실제로 주민의 68%는 ‘정부의 자활정책이 전혀 도움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 중 3분의 1은 ‘정부 보조금 수준의 임금이라면 취업하지 않겠다(34%)’고 답하는 등 건전하지 못한 근로 태도도 등장했다.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함에 따라 상당수 저소득층은 극도의 절망감을 나타냈다.본인의 빈곤 탈피 전망에 대해 65%가 사실 상 불가능하다고 답했다.특히 ‘자녀가 지금의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에는 절반 이상(56%)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망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유경준 연구위원은 “획일적·시혜 일변도의 대책은 갈수록 수혜자를 더욱 빈곤에 빠뜨릴 수 있다”며 “노동 수입 증가분만큼 세액을 공제해줘 근로의욕을 높이는 미국 저소득근로가구지원제도(EITC)의 도입 등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조흥식 교수(사회복지학)는 “우리 사회에는 사회병리·절망감 등의 ‘인간 빈곤’을 치유할 프로그램이 없다”며 “슬럼문화의 출현을 막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이규연.김기찬.이상복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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