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교과서 우향우] 4. 동아시아 침략 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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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의 검정신청본 내용이 알려지면서 내외의 거센 비판이 일자 ‘모임’의 사무국장은 이런 논평을 발표한 적이 있다.

“집필자와 편집진은 검정 합격을 향해 대담한 양보는 하면서도,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여 우리가 제안한 컨셉트의 골격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대담한 양보’란 무엇이었으며 이들이 지키겠다는 ‘컨셉트의 골격’은 무엇이엇는가를 동아시아 침략에 관한 기술을 중심으로 확인해 보자.

당초 검정 신청본에는 "일본은 전쟁목적이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 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 당당하게 기술돼 있었다.

1943년의 '대동아선언' 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태평양전쟁의 '자학사관' 을 제거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컨셉트의 골격' 이다.

이 부분의 '대담한 양보' 는 아래의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이뤄졌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 하에서는 일본어 교육, 신사참배가 강요돼 현지인의 반발이 강해졌다. 또한 전황(戰況)이 악화하면서 일본군에 의해 현지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종사당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 …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구상도 일본의 전쟁이나 아시아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진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 이른바 '양론병기(兩論倂記)' 를 내세워 초점을 흐리게 하며 컨셉트의 골격을 유지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발휘된 대목이다.

'대담한 양보' 는 도처에 보인다. 검정 신청시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의 승리가 "동남아시아인.인도인.아프리카인들에게까지 독립의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고 했다가, 합격본에서 '아프리카인' 부분만 삭제한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구미제국이 수백년 동안 결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미얀마.필리핀.인도.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의 독립을 승인했다" 는 부분은, "이러한 지역에서는 전전(戰前)부터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일본군의 남방진출은 아시아국가들의 독립을 앞당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로 고쳐졌다.

물론 당시 군국주의자들이 붙인 '대동아전쟁' 이란 컨셉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모임' 의 교과서는 또 침략전쟁을 전도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요컨대 전쟁의 가해자로서의 측면은 감추고 희생자의 측면을 대서특필하는 것이다.

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이 그렇다. 검정 신청본은 공습의 정황과 피해 내용을 장황하게 기술해 검정지시를 받았지만, 합격본에서도 단지 분량만을 줄였을 따름이다.

이와는 반대로 난징(南京)대학살에 대해서는 난데없이 엄격한 '실증적' 태도를 보인다. 신청본에서는 제목도 '난징 사건' 으로 둔갑시켰고, 중국 민중 20만명 이상이 살해됐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홀로코스트(대학살)와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고 쓰고 있었다.

수정된 합격본은 "도쿄재판에서는 일본군이 37년 중일전쟁에서 난징을 점령했을 때 다수의 중국 인민을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로 '대담한 양보' 를 했지만, 곧바로 "이 사건의 실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돼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며 난징학살의 신빙성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있다.

"이번 검정과정에서 참을 수 없는 수정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당초 취지가 그대로 반영된 교과서가 탄생하게 됐다" 는 '모임' 의 자평은 그들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싸움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과거의 침략전쟁을 그토록 기를 써서 변호하려는 것일까□ 여기에는 전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해소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다.

패전의 잿더미에서 벗어나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면서 일본은 줄기차게 경제대국에 상응하는 정치대국.군사대국으로의 길을 모색해 왔다. 99년에 주변사태법과 국기.국가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바로 그 전초전이었다.

현재의 중간 목표는 전쟁 도발을 금지하고 있는 헌법 9조의 족쇄를 푸는 일이고, 이를 위해 이미 '헌법조사회' 가 설치됐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면 당연히 지난 침략전쟁의 기억들이 되물어질 것이므로, 미리 손을 써둘 필요가 있다. 침략전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작업을 바로 '모임' 의 전사들이 떠맡은 것이다.

평화헌법의 파괴는 반드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긴장관계를 고조시킬 것이다. 우리가 이웃 나라의 한 교과서에 우려에 찬 눈길을 보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종문 교수<한신대.일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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