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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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1. 잊을수 없는 임원들

내가 은행장으로 있던 1983년 이후 88년 경제부총리를 마칠 때까지 외환은행은 부실 처리 전문 은행과도 같았다.

부실기업 정리를 맡은 용역회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경남기업 ·대한선주 ·범양 등이 외환은행의 손을 거쳐 처리됐다.

그 실무 주역이 이미 밝힌 대로 최승락(崔昇洛) 이사였다.84년 나는 캐나다 외환은행에 파견 나가 있던 그를 이사로 발령했다.

최창락(崔昌洛) 당시 한국은행 총재의 동생인 그는 형을 닮아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남의 담배 한 개피도 얻어 피우지 않을 만큼 고지식했었다.

그 후 그는 행내외에서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과 그 배후의 정치세력에 밉보여 부실기업 정리에 대한 비난을 한 몸에 뒤집어썼다.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고맙고 또 미안하다.

89년 내가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몸담고 있으면서 대검 중수부에 보낸 서면 답변에 “정책적으로 부실기업을 정리한 결과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나한테 있으며 이 일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재무부와 금융기관 임직원들에게 감사한다”고 쓴 것은 누구보다도 당시 딱한 처지에 있던 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또 한 사람 내가 초대 중소기업부장으로 발탁한 조성진(趙成鎭)씨를 잊을 수 없다.훗날 전무 연임을 한 그는 외환은행이 한보그룹에 대한 융자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막았고 독일 코메르츠방크와의 교섭 때 주역을 맡기도 했다.

국제금융부장으로 있던 허준(許浚)씨는 훗날 외환은행 출신 첫 행장이 됐다.허정(許政) 전 내각 수반의 아들인 그는 근무성적 평가에서 늘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

나는 “앞으로 외환은행 출신 행장 시대가 열려야 한다”며 “나같은 외부 인사가 행장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외환은행장 시절 나는 시중은행장들 가운데 이필선(李弼善) 제일은행장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일찍이 70년대 초 내가 주영한국대사관 재무관을 할 때 그는 외환은행 런던지점에 근무했었다.

그가 경기은행장을 거쳐 제일은행장으로 가기 전 외환은행 전무가 될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당시 재무부 국제금융차관보로 있던 내게 김용환(金龍煥) 재무장관(현 한국신당 대표)이 제일은행 임원 후보 10명을 우선순위를 매겨 적어 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다른 은행들은 이재국 관할하에 있었지만 외환은행과 외국은행들은 국제금융국 소관이었다.김장관은 나를 포함해 열댓 명에게 똑같은 주문을 해 놓고 있었다.

명단을 취합해 봤더니 상위권의 서너 사람은 리스트마다 거의 일치했다.

6∼7위권으로 내려가니 적어 낸 사람에 따라 들쭉날쭉 차이가 났다.그 때 리스트마다 상위 3분의 1의 범위에 유일하게 끼어 있던 인물이 이필선씨였다.임원 임기가 거의 끝나가던 그는 결국 유임이 아니라 전무로 발탁됐다.이같은 인선 방법을 나는 김장관으로부터 배웠다.

그 시절 이런 일도 있었다.김준성(金埈成) 당시 외환은행장이 외환은행 인사안을 들고왔다.그런데 훗날 내가 최승락씨를 이사로 승진시킬 때 캐나다 외환은행장으로 선임한 정인규씨가 신임 이사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다른 임원들에 비해 그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은 편이었다.김용환 장관에게 특이 사항으로 그의 나이를 거론했더니 김장관은 이렇게 받았다.

“그 나이면 정부에서는 장관도 하는데….은행장이 꼭 필요하다고 하면 해 줘.”

외환은행장 시절 나는 임원 인사에 대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첫 임원 인사 때 당시 관례대로 나는 인사안을 봉투에 담아 강경식(姜慶植) 재무장관(현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을 찾아갔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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