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칼럼] 미국서도 신문전쟁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언론개혁을 둘러싼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1895년 9월 뉴욕에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신문경쟁이 시작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을 발행해 성공한 윌리엄 허스트가 뉴욕에 진출, 조셉 퓰리처의 뉴욕 월드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당시 뉴욕에는 이미 여덟개의 조간신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발행부수는 퓰리처의 뉴욕 월드가 25만부로 가장 많았다. 허스트는 뉴욕 저널을 인수해 구독료를 절반으로 낮췄고, 두배 이상의 임금을 주기로 하고 퓰리처와 일하던 베테랑 언론인들을 빼내왔다. 덕분에 두달 만에 뉴욕 저널의 발행부수는 3만부에서 10만부로 늘었다. 퓰리처도 신문값을 내리며 맞대응했다.

그러나 퓰리처와 허스트의 경쟁은 서로 헐뜯고 무시하는 소모적 싸움은 아니었다.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선정보도를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독자들이 원하는 뉴스를 보다 재미있게 가공하는데 주력했고 그 결과 미국 신문의 질적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제목은 보다 선명하게, 사진과 그림은 더욱 정교하게, 기사는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바뀌었다. 특히 두 신문 모두 정치계 부패를 고발하고 대기업의 횡포를 공격하면서 '보통 사람의 대변자' 라는 미국 신문의 전통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허스트와 퓰리처가 촉발한 신문경쟁은 다른 지역신문들의 선정적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자연 미국 신문들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도는 계속 떨어졌다. 특히 신문이 미국 사회의 다른 영역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비판엔 인색하고 오만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947년 미국의 저명한 학자와 지식인들로 구성된 허친스 위원회는 "미국 언론은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와 오류, 거짓말과 스캔들을 외면하고 있다" 고 비난하면서 보다 책임있는 언론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언론은 허친스 위원회 보고서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 언론이 겸허히 비판을 수용하고 매체비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60년대 이후였다. 당시 미국 신문은 큰 위기를 맞았다. 흑인평등권 쟁취나 월남전 반대운동과 같은 정치.사회적 이슈가 언론을 통해 공론화되지 못했다. 집회와 시위.폭동이 빈발했고 미국 사회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언론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언론계 내부에서도 신랄한 자기 비판이 터져 나왔다. 뉴욕타임스의 A H 라스킨 기자는 자사의 신문 지면을 통해 "언론이 정부와 노조, 기업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선 비난도, 지적도 하지않고 있다" 며 언론계의 자성을 촉구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신문이 상호비판.감시를 시작했다. 이런 변화 덕분에 미국 신문은 독자들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고 70년대 들어 월남전 참전의 부당성을 고발한 '국방부 보고서' 사건과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그 위치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에선 한겨레가 3월 초부터 '심층해부 언론권력'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신문간 상호비판이 시작됐다. 그러나 한겨레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된 신문들은 강력히 반발했고, 여기에 한나라당이 한겨레를 김대중 정부의 대리인에 비유하고 나서면서 격앙된 감정싸움으로 변하고 있다.

자기비판에 익숙지 못한 한국 언론에 한겨레의 폭로기사는 과거의 동지가 적으로 바뀌는 배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번 신문간 대결은 특정 언론사간의 감정싸움이나 정쟁의 도구로 빗나가지 말고 한국 언론사에 새 이정표를 세우는 계기가 돼야 한다.

장호순 순천향대 교수 ·신문방송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