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정재의 시시각각

‘해방구’ 된 북한 국경 6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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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당장 부작용이 생겼다. 왜색·저질 프로그램이 속속 전파를 타고 전파됐다. 일본 여성 연예인이 심한 노출을 하는 ‘11pm’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국내 방송사들은 앞다퉈 일본 프로그램을 베꼈다. 내로라하는 PD들이 수시로 부산에 내려갔다. 대마도까지 원정하는 이도 있었다. 한때 방송가에선 ‘우정의 무대’ 빼고는 모두 일본 TV를 베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군대가 없는 일본인지라 군부대를 찾아가 노래와 쇼를 하는 우정의 무대 같은 프로그램은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혼란도 컸다. 군사독재 시절 꽁꽁 막아놓은 빗장이 군데군데 풀렸다. 국민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소식들이 여과 없이 들어왔다. 이런 소식들은 유신 말기 부산의 민심 이반을 부추겼다. 당시 부산에선 위성 안테나 설치 붐이 일기도 했다. UHF 안테나에도 신호가 잡혔지만 더 또렷이 보고 싶은 이들이 많았다.

40년 세월이 흘러 비슷한 일이 생겼다. 이번엔 북한이다. 일본 대신 중국, TV 대신 휴대전화로 바뀐 게 다를 뿐이다. 중국은 북한 접경 지역에 기지국을 촘촘히 세우고 전파를 쐈다. 동북 3성 내 휴대전화 통신을 위해서다. 그런데 그 전파가 최대 180㎞, 적어도 60㎞를 가는 바람에 사단이 났다. 또 전파월경이 일어난 것이다.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전파가 미치는 중국 접경 60㎞ 지역이 ‘해방구’가 됐다. 중국 휴대전화로 세계 어느 곳 누구와도 통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몰래 중국 휴대전화를 숨겨두고 수시로 남한의 탈북 가족과 시간을 정해 통화한다고 한다. 돈도 주고받는다. 마침 잘못된 화폐개혁으로 경제는 파탄지경이다. 식량난도 겹쳤다. 남한에서 건네지는 돈은 생존과 직결된다. 돈을 제대로 주고받으려면 휴대전화 통화는 필수다. 한 번 통화하기가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처음엔 ‘용건만 간단히’지만 조금 지나면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게 마련이다. 중앙SUNDAY 최신호(3월 7일자)는 이런 현장을 생생히 중계했다. “지도자 동지는 어떠신가”는 질문엔 아직 “겁난다”며 후다닥 전화를 끊는단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더 빠르고 많은 소통이 이뤄질 것이다. 벌써 남한 탈북자가 보낸 돈을 받기 위해 평양에서 국경 지대로 올라가는 이들이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한 탈북자는 “평양시당이 평양 주민을 국경 지대로 옮기고 대신 국경 지역 주민을 내려보내야 한다는 얘기를 할 정도”라고 말했다.

휴대전화 송금엔 불법이지만 국제 금융기법도 등장한다. 이른바 환치기다. 은행에서 정식 환전을 안 하고 브로커끼리 거래하는 방식이다. 탈북자들이 남한의 브로커에게 원화를 주면 송금을 확인한 뒤 중국의 브로커가 위안화를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전해준다. 100만원을 보내면 70만원쯤 전달된다고 한다. 30만원은 수수료로 뗀다. 원래 환치기 사범은 세무당국의 특별 단속 대상이다. 그러나 탈북자의 송금은 몇 년 전부터 내버려둔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금액도 작은 데다 북한 주민을 생각해 못 본 체한다”고 말했다.

예부터 금성철벽으로도 막기 어려운 게 돈의 왕래다. 여기에 전파라는 첨단 기술까지 거들었다. 게다가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한다. 지금은 60㎞뿐이지만 북한의 ‘해방구’가 언제 600㎞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게 바로 내일이라면 중국 돈과 휴대전화 대신 북녘에 전해줄 우리의 돈과 휴대전화는 준비돼 있는가.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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