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오래된 미래' 사진은 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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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린위탕(林語堂)의 멋진 책『생활의 발견』중 지금도 기억나는 진짜 멋쟁이는 진성탄(金聖嘆)이다.

17세기 중국의 기인인 그가 '인생에서 유쾌한 33가지 일' 을 미주알고주알 꼽았던 것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하긴 나도 간혹 진성탄 식 몽상을 즐긴다.

누가 나더러 "당신 방 기천장의 음악CD 중 눈 딱 감고 애청음반 열장만 뽑아보라" 고 하면 어떤 라인업으로 할까 즐거운 고민을 해보는 것이다.

자, 바하 '평균율 전곡' 만해도 잔뜩인데, 옛 거장 리히테르나 파인버그로 고를까 아니면 신예 안젤라 휴잇의 레코딩으로 할까 매번 판단이 안 선다.

때문에 'CD 베스트 10' 목록은 항상 바뀐다. 반면 '좋아하는 책 베스트 10' 은 다르다. 이 경우 나는 '오래된 미래' (녹색평론, 1996)를 우선적으로 포함시킬 참이다.

스웨덴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티베트 '라다크' 를 살펴보며 '빈곤하지만 위엄에 찬' 그 곳의 삶을 인류 앞날의 대안이라고 제시한 것이 이 책이다.

달라이 라마 서문이 실린 이 책은 유럽 지식사회에서도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서도 소문없이 10만여권 팔려나간 보석이다.

현대문명사에 대한 탁월한 성찰인 이 책은 제목부터가 얼마나 명쾌한가? 『Ancient Future』, 즉 인류의 진정한 미래는 '서구 모더니티의 진보' 쪽에 있지 않고, 그 반대 편에 놓여있다고 언명한다.

라다크가 보여주듯 '인간-지구 공동진화의 생존양식' 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 이 서구 지식인의 생생한 증언이다. 내가 이 책을 새삼 떠올린 것은 강운구 사진전(금호미술관, 31일까지) 때문이다.

관람 인파 때문에 개관 이래 처음으로 월요일 휴관을 없애기로 했다지만, 무엇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또 관람객들은 무슨 이유로 전시에 맞춰 나온 사진집 『강운구 마을 삼부작』(열화당, 2만5천원)에 작가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이을까? 물론 작가 강운구는 황규태.주명덕과 함께 국내 사진을 이끄는 중진이지만 '미술동네의 행랑채' 인 사진장르와 사진집에 이런 호사는 전에 없던 풍경이다.

내가 보기에 이 현상은 이제는 사라진 30년 전 강원도 산골마을의 풍광과 '가난했지만, 의젓했던' 사람들이 풍기는 서정과 위로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삶의 정글' 도회지의 삶과 모더니티 한 세대 동안 겹쌓인 피로를 씻고 싶은 것이다. 이 역설을 강운구는 작가 조세희가 '가위 명문(名文)' 이라고 했다는 사진집의 서문「시간과의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에서 밝힌다.

"사진은 현재를 찍는다지만, 필름에 영상을 비추는 순간 과거가 돼버리고 만다. 그래서 '슬픈 사진' 이다. (하지만)사진은 슬프지 않다.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 " (21쪽).

올해로 갑년(甲年)을 맞은 작가의 감상(感傷)이 묻어나지만, 만일 호지 여사가 이 사진집을 본다면 뭐라 할까? 외양으론 번듯하면서도 왠지 공허하고, 때깔은 번드르르하면서도 속병 든 우리네의 요즘 사는 모습보다 의젓한 삶이고, '오래된 미래' 라고 서슴없이 말하지는 않을까? 물론 그건 현실적 대안과는 거리가 먼 낭만적 회귀의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들의 판단에 선뜻 공감하고 싶은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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