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실패한 정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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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잦은 말실수는 실패한 정치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사려 깊지 못한 말 한마디 때문에 치명상을 입은 정치인이 어디 한둘인가. 총리가 된 지 11개월 만에 사실상 퇴진 의사를 밝히고 '식물총리' 로 물러앉은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총리. 취임 초 모리 총리는 "일본은 역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 다" 고 거룩하게 한말씀 했다가 혼쭐이 났다.

설령 소신이 그렇더라도 일국의 총리라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역사인식과 국제감각의 부재를 만천하에 스스로 공개한 꼴이 됐다. 곧 물러날 사람을 두고 '일처리는 민첩하게, 그러나 말은 신중하게(敏於事而 愼於言)' 라는 선현의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언론혐오증은 실패한 정치인의 또다른 특징이다. 모리 총리는 언론이 진의를 왜곡한다며 한동안 취재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지지율이 한자릿수로 떨어져 역대 정권 중 최하위권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우리 집에도 전화와 편지가 꽤 오는데 대부분 힘내라는 격려다.

비판하는 내용은 별로 없다" 고 반박한 사람이 모리 총리다. 급기야 "요즘에는 신문을 안봅니다. 피곤해지거든요" 라고 넉살 좋게 실토할 정도로 그의 언론혐오증은 중증이다. 언론의 비판에 귀를 막은 정치인이 성공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가 아닐까.

실패한 정치인은 상황판단이 미숙하다는 점에서도 통하는 데가 있다. 골프장에서 모리 총리는 일 고교생 실습선이 미 핵잠수함과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라운딩을 계속해 스스로 명을 재촉했다.

"이게 어떻게 위기관리에 해당하느냐, 사고 아니냐" 고 '억울함' 을 호소했으니 그의 상황판단력을 알만하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자 안달이 난듯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갖자고 팩스를 보냈다는 얘기도 있다.

실패한 정치인의 불행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국민은 물론이고 이웃나라까지 불행이 미칠 수 있다. '3월 위기설' 이 나돌 정도로 지금 일본경제는 심각한 상황이다. 금융시스템을 포함한 구조개혁과 정치개혁이 최선의 해결책인 줄 알면서도 당장의 표 때문에 일본 정치인들은 손을 못대고 있다. 빚 얻어 경기를 부양하는 헛된 악순환만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위기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미칠 정치.경제적 파장을 생각하면 강 건너 불로 볼 일이 아니다. 비전과 역사의식을 가진 21세기 일본 지도자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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