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에게 ‘궐기’를 許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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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호 02면

현대자동차가 이달부터 신형 쏘나타를 리콜하고 있다. 현대차나 자동차산업 입장에선 불행한 일이지만 솔직히 ‘올 게 왔다’는 느낌이다. 문제가 된 건 도어잠금 장치 이상이다. 주행 중 갑자기 차 문이 열릴 수 있다는 결함이다. 하지만 그런 지적은 진작부터 있었다. 지난해 9월 신형 쏘나타가 출시됐을 때부터 자동차 동호회가 줄곧 제기했다. 현대차가 귓전으로 흘려 들었을 뿐이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그런 상황에서 지난달 초 미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미 언론이 결함을 지적했다. 그러자 현대차는 즉각 리콜을 발표했다. 국내 판매 차량도 리콜 대상에 끼워 넣었다. 현대차의 대응이 180도 달랐다는 얘기다. 내국인이 문제를 제기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현대차 아닌가. 국내 소비자를 미국인만큼 중시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내의 지적에 진작 귀를 기울였더라면 리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현대차가 국내 소비자를 무시하는 듯한 행태는 이뿐 아니다. 수출용 차량에 장착하는 안전 장치가 내수용 차엔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며칠 전 리콜을 발표했던 투싼ix의 어드밴스드 에어백이 그중 한 예다. 미국 판매 차량에는 ‘좋은 에어백’을 달지만 국내 차량에는 그저 그런 에어백을 장착한다는 게 드러났다. 그러니 ‘현대차는 자국민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다’는 비난을 듣는 게 아닐까.

문제의 뿌리는 현대차가 국내에서 독점 기업이라는 데 있다. 국내 시장의 무려 50%를 차지하고 있다. 계열사인 기아차까지 합치면 점유율이 80%나 된다. 현대차가 ‘배짱 장사’를 하도록 조장하는 시장 구조다. 반면 미국에서는 수많은 자동차 메이커 중 하나다. 경쟁 구조니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내 독점 현상은 1999년 현대의 기아차 인수 때부터 줄곧 지적돼온 문제다. 이른바 독점 기업의 시장지배력 남용이다. 소비자 이익은 침해될 수밖에 없다. 기아차 인수 후부터 현대차가 무이자 할부 판매를 하지 않는 이유다. 미국 소비자가 불평하면 즉시 리콜하지만, 국내 소비자는 아무리 불평해도 꿈쩍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해결 방안은 경쟁 구조로 되돌리는 것이다. 현대차를 둘로 쪼개는 기업 분할이나, 기아차를 현대·기아차그룹에서 떼내는 계열 분리가 최선책이다. 문제는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충격도 엄청날 것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뭔가. 소비자가 궐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해답이다. 소비자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소비자 스스로 보여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조물 책임(PL)법을 고치고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라. 차량 결함으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소비자들이 손쉽게 소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사고가 났을 때 입증 책임을 대부분 소비자에게 지운다. 현행 PL법에는 사고 입증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다. 하지만 소비자가 복잡한 기술상 결함을 입증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PL법을 고쳐 입증 책임을 기업이 지게 해야 한다. 공공 소송 제도를 도입하거나 국가 차원에서 소비자 소송기금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또 소비자가 소송에서 이기면 기업이 큰 손실을 볼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도입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도입하자는 주장이 많았지만 기업들의 반대로 묵살됐던 방안이다. 지금은 소비자가 이겨도 손해 본 만큼만 배상받는다. 실손(實損) 배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소송할 인센티브가 없다. 미국은 뜨거운 커피 때문에 화상을 입은 사람에게 맥도날드가 16만 달러의 실손 배상 외에 270만 달러의 징벌적 배상을 하는 나라다. 현대차가 미국에서 서둘러 리콜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다. 물론 소송 남발 같은 부작용도 있을 게다. 소송 전문 변호사만 이득을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기업만 감싸고 돌 순 없다. 미국이 하는데 우리가 못할 까닭도 없다. 적어도 독점 기업이 내국인을 무시하는 행태는 바로잡을 수 있다. 지극히 사소한 결함에도 사람 목숨이 오가는 자동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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