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윈도] NMD보다 급한 '총기' 방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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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웃으면서 마구 권총을 쏘아대는 15세 소년, 비명을 지르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친구들, 학교 밖으로 줄달음치는 여학생들, 그들을 가슴에 묻으며 공포를 달래는 부모들….

'학교괴담(怪談)' 영화에나 나올 장면이 5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재연됐다. TV는 오후 내내 이를 틀어대며 긴급뉴스를 전했다. 앵커들은 물었다.

"도대체 왜(Why)?"

전문가들이 출연해 열심히 토론을 벌이지만 공허하게만 들린다. 도대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 2년 전 15명이 죽은 컬럼바인 고교 사건 이래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쏘지 못하게 안전자물쇠를 의무화하자" 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법안은 하세월이다. 여덟살짜리 초등학생이 권총을 학교에 갖고와 자기 친구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을 때도 의회와 언론이 떠들어댔지만 결국은 제풀에 지쳐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권총규제' 라는 민간단체에 따르면 미국에선 일주일에 한명 꼴로 학교에 총을 가지고 온 학생이 적발된다. 지난달만 해도 다섯살짜리가 총알이 가득 장전된 9㎜ 반자동화기를 지니고 있었고 일리노이주에선 열두살짜리가 가방에 반자동권총을 숨겨 하루 종일 옷장에 두었다.

그날 그 소년이 교사에게 심한 꾸지람을 듣거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더라면 또 총성이 울렸을지 모른다. 그런식으로 해서 매년 미국인 8백명이 열아홉살 미만의 아이들이 쏜 총에 목숨을 잃는다.

총기사고는 학교를 이상한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5일 사건이 터지자 교육장관 로드 페이지는 "모든 학부모와 학생은 학교나 교사.급우에 대해 불만이나 화를 표현하는 학생을 아주 주의깊게 봐야 한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

심하게 표현하면 이제 미국의 어린 학생들은 선생이나 친구의 흉을 보는 자유와 추억마저 상실하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간 총기 사고를 치려는 전조로 해석될 마당이기 때문이다. 불만이 말로 소화되지 못하면, 오히려 어린 가슴속에 쌓여 병이 나거나 더 큰 사건으로 터지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문제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총기박람회 같은 데서 아무런 규제 없이 기관총까지 살 수 있다. 총기규제에 시큰둥한 공화당이 집권했으니 법안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됐다.

미 대륙으로 날아오는 모든 미사일을 국가미사일방위(NMD)계획으로 떨어뜨리겠다는 게 부시 행정부의 원대한 계획이다. 그런 미국이 자기나라 소년.소녀의 총알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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