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 슬럼프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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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이세돌3단이 강한 것인가. 아니면 이창호9단(사진)이 난조를 보이고 있는 것인가.

바둑계의 비상한 관심이 두 기사에게 쏟아지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앞으로 변해 갈 바둑계의 판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세돌이 2연승했고 내용면에서도 압도해 더욱 충격을 던진 LG배 세계기왕전을 되돌아 보자.

첫판에서 이9단은 힘없이 대마를 죽였고 둘째 판에서는 이세돌의 실리전법, 즉 선실리(先實利) 후타개(後打開)의 전형적인 전법에 휘말려 가장 싫어하는 공격바둑을 구사하다 중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건 이창호의 스타일도 아니고 이창호식의 승부호흡도 아니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태공을 연상시키는 장구한 기다림과 끈기, 그리고 무한한 신중성과 두터움, 태산 같은 부동심(不動心)과 귀신이 곡할 종반의 계산능력, 이런 것들이 바로 이창호의 스타일이며 주무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결에서 이9단은 자신이 가장 멀리하는 '생사를 건 절박한 바둑' 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그의 승부호흡이 무너지고 말았다. 패인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창호는 왜 자신의 스타일 과 다른 바둑을 두게 되었을까.

바로 여기에 이세돌의 강점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예전의 이창호라면 이세돌의 공격적인 예봉을 피해 장기전을 구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1인자로서 이창호의 자존심은 후배 이세돌의 도전을 피해 장기전을 펴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1인자의 권좌에 앉은 지 오래된 이창호는 인생의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예전과 같은 집중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이창호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이세돌이란 존재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창호가 예전의 부동심과 승부호흡을 회복한다면 두 사람의 승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9단은 4일 새벽 이틀간의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군부대로 떠났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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