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던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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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규혁은 “항상 잃기만 한 올림픽이었는데 이번에는 얻은 게 더 많았다”며 밴쿠버 올림픽의 기억을 떠올렸다. [강정현 기자]

TV 개그 프로그램에서 술 취한 남자는 이렇게 외친다. 과연 그런가.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온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규혁(32·서울시청)을 향해 격려와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이규혁은 3일 열린 밴쿠버 올림픽 선수단 청와대 오찬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 다섯 번 올림픽에 출전해 단 하나의 메달도 얻지 못한 이규혁이 ‘피겨 여왕’ 김연아 못지 않은 환대를 받은 것이다.

지난 주말,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서울 보문동의 스케이트 제조업체 사무실에서 이규혁을 만났다. 이날 하루만 6건의 인터뷰가 잡혀 있다는 이규혁의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그는 “올림픽 다섯 번 나가서 메달 하나도 못 딴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걸 보니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아닌 것 같은데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의 뒤끝에는 쉽게 걷어낼 수 없는 미련과 회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누우면 경기 장면이 떠올라 잠을 설칩니다.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규혁은 애써 웃고 밝은 표정을 짓기로 했다. 격려 메시지를 보내준 수많은 팬을 생각하면 힘을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올림픽 여운 느껴보고 싶은데…관중이 없네요”

-경기가 끝난 경기장에서 빙상 선배 제갈성렬과 통화한 위 내용이 화제인데.

“1000m를 9위로 들어오면서 나의 올림픽은 모두 끝났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마지막으로 스케이트장을 한번 더 보고 싶어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마침 하나둘씩 조명이 꺼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울면서, 천천히 걸으면서 얼음의 느낌을 음미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지금 다시 한 번 해보면 어떨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었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게 슬펐다’고 했는데.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역주하고 있는 이규혁 선수. [연합뉴스]

“4년 동안 정말 잘 준비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500m 경기 전날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너무나 안 좋았다. ‘좋아지겠지’라고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경기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정빙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경기가 한 시간 반이나 지연됐다. 안 좋은 일들이 겹치면서 ‘어렵겠구나’ 싶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눈물이 났다.”

-만약 정빙기 고장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건 누구도 모른다. 극도의 긴장과 집중 속에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다시 드러눕고 하기를 서너 차례나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나이가 많은 게 불리하다는 걸 처음 느꼈다. 긴장감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체력이 떨어졌다는 걸 절감했다.”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는데.

“첫 올림픽인 1994년 릴레함메르에서 운이든 실력이든 메달을 따야 했다. 그러면 ‘올림픽 메달’을 따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다. 그때 실패하면서 올림픽 징크스가 생겼고, 그 바람에 경기를 즐기지 못했다. 어머니는 ‘열심히 탔고 최선을 다했으니 네가 최고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얼마나 쓰린 속을 달래면서 날 위로하려는 말인지 잘 안다. 이번 대회 성공해서 어머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쾌속 세대 후배들 나보다 훨씬 뛰어나”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 하나씩을 따낸 모태범(21)·이상화(21)·이승훈(22·이상 한국체대). 이들은 이규혁을 보면서 꿈을 키워온 ‘이규혁 키즈’다. 최고 11살 차이가 나는 이들을 끌어가고 때로 경쟁하면서 이규혁은 대한민국 빙속을 세계 최강 반열에 올려놨다. 이규혁은 “이들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무엇보다 내가 못 가진 ‘올림픽 메달’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후배들은 너무나 겸손하고 착하다”라며 이들을 극찬했다.

-이상화는 ‘스케이팅을 포기하려 했을 때 규혁 선배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용기를 줬다’고 했는데.

“상화는 정말 특별한 선수다. 중학교 때 대표에 선발됐고, 월드컵 1,2위를 하는 선수였는데 대학 1학년 때 대표선발전에 떨어질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다. 당시 ‘너는 세계적인 선수다. 다시 올라가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며 격려했다. 사실 내가 상화로부터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번에도 내 경기가 끝난 뒤 상화가 울면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내일 네 경기에 지장 있으니 들어가서 자라’고 겨우 달래서 보냈다.”

-모태범은 ‘규혁이 형은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는데.

“태범이는 끼가 넘치는 친구인데 내 앞에서는 그걸 많이 감추고 지냈다. 금메달을 따는 데 내가 큰 도움을 줬다고 했는데 우리는 대화하고 경쟁하면서 서로 많이 배웠다는 게 맞다.”

-이승훈은 구체적인 재테크 계획을 세울 정도로 셈에 밝다던데.

“그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나는 워낙 어린 나이부터 연금과 상금으로 돈을 벌었지만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스타일이다. ‘베풀면 그만큼 돌아온다’는 게 내 지론이다. 우리 빙속 선수끼리는 조금씩 주식 투자도 한다. 너무 욕심내지 않고, 좋은 정보가 있으면 서로 공유하면서 재테크를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쾌속 세대’라 이름지었다. 곁에서 지켜본 쾌속 세대의 특징은.

“이 친구들은 소속팀(한국체대)에 돌아가면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될 고참인데 대표팀에서 막내 역할을 자청했다. 스승의 날 때 김관규 감독님을 위해 개그콘서트 장면을 재연하며 망가졌다. 내면의 동기 부여가 뚜렷하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는 점이 인상깊었다. 메달을 딴 뒤에 공을 선배인 나에게 돌리는 걸 보면서 참 많이 놀라고 고마웠다.”

- 후배들의 메달이 부럽지 않은가.

“올림픽 메달이 왜 안 부럽겠나. 그런데 더 부러운 건 이들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또 마음이 힘들고 울컥해진다.”

이규혁은 여자친구가 없다. 이번 올림픽에 전념하려고 일부러 안 사귀었다. 취미도 스케이팅에 도움이 되는 웨이크보드(수상스키의 일종)를 할 정도였다. 그는 “내 인생에서 스케이트를 빼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랬던 이규혁이 노메달로 올림픽 도전을 마감했다. 그런데도 그는 말한다. “항상 잃기만 한 올림픽이었는데 이번에는 잃은 것 이상으로 얻은 게 많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은 지나갔다.

글=정영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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