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수익 내라, 단 시장붕괴 막으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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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시대가 바뀌었다.금융기관도 살아남으려면 수익을 내라.하지만 시장이 붕괴되지 않도록 해야 수익도 낼 수 있다.”

21일 경기도 분당 삼성생명 휴먼센터에 모인 금융기관 최고경영자(CEO)2백여명이 찾은 공통 분모다.대조적인 개념으로 보이는 ‘수익성’과 ‘공익성’을 조화시키자는 것이다.

은행·증권·보험·종금·투신사 등 권역별 금융기관 CEO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이날 작심한 듯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강조했다.그전에는 성장성과 안정성이 중요했지만 이젠 ‘금융회사’로 살아 남으려면 수익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나섰다.그는 특히 수익을 올리라고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론 금리를 낮추라고 주문했다.금리인하는 고수익을 노리는 자금들을 직접 금융시장으로 이동시켜 채권·주식 시장을 활성화시킬 것이며,이는 기업의 도산 위험을 줄여 은행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논리였다.

李위원장은 금융권 노사의 뜨거운 감자격인 계약연봉제와 사업본부제 정착을 주장한 것도 주목을 받은 대목.그는 “계약연봉제나 독립채산적인 영업본부제가 도입된 지 여러해가 지났으니 이제 결실을 기대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이어 그는 제2금융권도 선진 금융권의 추세인 대형화·겸업화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날 주제발표자로 나온 김병주 서강대 교수의 강연은 더욱 진솔했다.金교수는 “왜 이 시점에서 이렇게 많은 CEO들을 한곳에 모았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나도 헷갈린다”며 “내 짐작으론 수익성을 원칙으로 해라.그러면서도 공익성을 잊어버리지 말기를 주문하는 자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金교수는 “평상시 같으면 수익성만 추구할 수 있다.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시장 전체가 붕괴할 조짐이 있다면 개인 플레이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너무 솔직한 얘기가 쏟아지다 보니 웃음도 자주 터져나왔다.金교수는 CEO들을 향해 “여러분들이야말로 3D(더럽고,힘들고,위험한)직종에 일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심지어 金교수는 “정부 당국자가 이래라 저래라 경영에 간섭하면 행장실에 녹음기를 설치해 버려라”고 주문할 정도였다.그러면서 그는 “금융기관이 상업회사로 살아남으려면 CEO가 경영철학을 세우고,기업문화를 만들어야 하며,인사가 투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교수는 특히 “정부가 은행에 개입하려고 그동안 정부 지분을 팔지 않은 것 아니냐”,“외환위기 이후 3년이 지났는데도 중앙은행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등 정부와 한국은행의 아픈 곳을 꼬집었다.이어 그는 “장관들 중에는 윗사람을 잘 모시고 아래를 짓밟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행장들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폐회사에서 보다 직설적으로 금융기관의 시장안정에 대한 협조를 당부했다.陳부총리는 “금융중개 기능을 정상화하기 위해 금융기관들이 제대로 노력하지 않고 있다”며 “최근 외국계 은행(씨티은행)이 국내 대기업 그룹의 한 계열사(현대전자)에 대한 신디케이트론(협조융자)을 주는 등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국내 금융기관들은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그는 “프라이머리 CBO(발행시장 채권담보부증권)와 CLO(대출채권 담보부증권)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이 노력하지 않아 지연된 감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금융권 경영자들의 입장은 다소 냉소적이었다.몰라서 못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한 시중은행장은 “개별 은행이 시장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라며 “정부가 나서서 시스템 자체를 선진화하는 노력부터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경부 관계자는 “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여러가지 제도적인 보완 장치를 마련했는데 금융기관의 소극적인 태도로 효과가 줄어든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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