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총리 유력 연형묵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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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연형묵이 1992년 12월 당정치국원과 총리에서 물러나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자리를 옮겼을 때만 해도 그의 중앙무대 복귀를 점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98년 그는 자강도를 자력갱생의 모범지역으로 만든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를 받고, 국방위원으로 발탁됐다.

지난 1일 평양방송은 98년 1월 자강도에 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연형묵의 가족을 자신의 열차숙소로 불러 격려를 했다는 일화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金위원장이 "한개 도를 책임지고 늘 아래에 내려가 일하다보니 언제 한번 가족들과 단란히 마주앉아 즐거운 식사를 해봤겠는가" 라며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이다.

金위원장이 특정 간부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는 사실을 북측 언론이 공개한 것은 延비서에 대한 金위원장의 각별한 애정을 짐작케 한다.

사실 두사람 일가의 인연은 상당히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金日成)주석이 독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延비서의 부모가 그를 구해주었다는 일화는 북한에선 꽤 널리 알려져 있는 얘기.

金주석은 해방 후 10대의 연형묵을 만주에서 데려와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시키고 해외유학까지 보내는 등 남달리 총애했다.

이런 인연이 연형묵으로 하여금 40대의 젊은 나이에 당비서.정치국원으로 일찌감치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도록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延비서는 74년부터 당중앙의 3대혁명소조 중앙지도부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당시 후계체제 확립에 나선 金위원장과 호흡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그는 70년대 후반 지방의 공장지배인으로 좌천당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곧바로 재기해 20년 이상 金위원장의 경제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청렴성은 金위원장이 그를 신임하는 또다른 이유다. 그의 검소한 생활은 북한에서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金위원장의 여동생인 김경희(金敬姬)당부장이 97년에 자강도 지방검열에 나서 연형묵의 사택을 불시 방문해보니 밥상에 보리밥과 반찬 두가지밖에 없었다는 것. 검소하다 못해 궁핍한 살림살이를 보고 김경희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다.

延비서는 러시아어를 비롯, 외국어에 능통하고 합리적 성격과 과감한 추진력을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앞으로의 정치역정은 경제재건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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