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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비준 갈 길 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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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뒤 비준 가능성은 더 악화됐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세계 금융위기, 80년 만의 최악의 불경기, 아프가니스탄 전황 악화 같은 악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난제(難題)들과 씨름하느라 한·미 FTA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악의 금융위기는 지나갔지만 계속되는 경제 불안과 실업 문제, 그리고 11월 중간선거에 밀려 한·미 FTA는 뒷전이 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번의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중간선거가 오바마의 국내 어젠다의 성패를 가를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고(故) 에드워드 케네디가 오랜 세월 지켜온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자리를 공화당의 스콧 브라운에게 빼앗긴 충격이 컸다.

오바마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의석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모두 한·미 FTA와 관련 있는 것이다.

첫째, 의료보험 개혁과 일자리 창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선거 때 자신이 내건 주요 국내 공약이다. 의료보험 제도를 개혁하지 못하면 오바마는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유권자들은 ‘능력 없는 정부’라고 비판할 것이다. 중간선거에서 막대한 표를 잃게 될 게 뻔하다. 마찬가지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오바마의 경제 정책은 좌초된다. 이 두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오바마는 의회 내 모든 민주당 의원을 결집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FTA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의원이 많다. 비준을 압박하면 분열될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백악관 보좌관들은 대통령에게 중간선거 전까지 FTA 처리를 미루라고 권유하고 있다.

둘째, 중간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기반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유권자들은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집권 세력에 비판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많은 민주당원은 이미 기운이 빠진 상태다. 오바마 정부가 월스트리트 개혁, 관타나모 기지 테러범 수용소 폐쇄 같은 핵심 공약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인 노동계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재협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오바마에게 실망하고 있다. 노동계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에서 오바마와 민주당 의원들이 노조가 반대하는 FTA 비준을 추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령 이번 봄에 자동차 시장 추가 개방 문제가 풀리고 오바마가 의회에 비준안을 제출한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중간선거 전 의회 표결이 이뤄지긴 힘들다. 의회가 처리해야 할 법안이 이미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일자리·금융 개혁·교육·에너지·기후 변화 관련 법안들이다.

더구나 이 법안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의원들의 관심이 이미 선거운동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올해 안에 한·미 FTA안을 검토하고 비준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오바마는 분명히 한·미 FTA를 지지하고 있다. 협정이 비준되면 수출을 늘리고 아시아를 다시 끌어안는 데 도움이 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비준 처리를 강행하다간 자신의 국내 어젠다를 망칠 위험이 크다. 진퇴양난의 상태다.

이럴 때 한국이 추구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오바마로부터 선거가 끝나는 대로 의회 비준을 압박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최소한 연내 한·미 FTA 비준을 막는 걸림돌들을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해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한·미 FTA에 대해 사려 깊고 참을성 있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미국에 이 같은 비준 로드맵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런 로드맵을 만들어 놓으면 미국도 적절한 계획을 세워 협정에 최종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석한 변호사·미 워싱턴 애킨검프 법률회사 시니어 파트너
정리=김한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