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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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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기적은 고통과 함께 온다.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1849∼1903)의 삶도 그랬다. 그는 12세 때 폐결핵에 걸렸다. 뼛속을 파고든 몹쓸 균 탓에 훗날 왼쪽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시인은 항상 쾌활하고 열정적이었다.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떡 벌어진 덩치에 목발을 짚고 다니던 친구를 『보물섬』에 등장시켰다. 그 유명한 외다리 실버 선장으로.

‘인빅투스’는 헨리가 1875년 쓴 시다. 인빅투스(invictus)는 ‘굴하지 않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이 작품을 쓰기 몇 년 전 그의 오른쪽 다리에도 감염이 진행됐다. 의사들은 절단수술을 받아야 목숨을 건진다고 했지만 시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3년에 걸쳐 끈질긴 치료를 받았고, 이후 30년 가까이 더 살았다. 이 시에는 고통을 넘어선 자의 환희가 담겨 있다.

‘온 세상이 지옥처럼 캄캄하게/나를 엄습하는 밤 속에서/나는 어떤 신들에게든/내 굴하지 않는 영혼을 주심에 감사한다. (…) 천국 문이 아무리 좁아도/저승 명부가 형벌로 가득 차 있다 해도/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요/내 영혼의 선장인 것을’. 시인이 굴하지 않았던 건 병마가 아니라 고통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싶은 본능이 아니었을지.

‘인빅투스’는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애송시이기도 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9년작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invictus의 영어식 발음)’를 보면 대통령이 된 만델라가 국가대표 럭비팀 주장을 불러 이 시를 읽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1년 후 월드컵에서 우승해 흑백 화합의 물꼬를 터달라는 간절한 당부와 함께. 시인과 지도자가 공유했던 불굴의 정신은 당시 최약체로 평가받던 꼴찌 럭비팀을 일으켜 세운다. 1995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역대 최강팀 뉴질랜드를 꺾는 이변이 연출된 것이다.

굽힘 없는 정신은 고귀하다. 오늘 막을 내리는 밴쿠버 겨울올림픽을 통해 우리가 느낀 사실이다. 승리의 공식은 없었다. 우리 선수들은 한없이 약해지려는 욕망, 저마다 지닌 한계에서 오는 절망과 싸웠다. “안 되는 것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슬펐다”는 이규혁 선수나, “이제 모두 끝났다”며 눈물 흘리던 김연아 선수나 모두 기적의 연출자다. 넘어지는 불운을 연거푸 겪고서도 다음 올림픽 도전의사를 밝힌 성시백 선수는 또 어떤가. 지지 않는 정신, 굴하지 않는 영혼. 시대와 장르를 불문한 감동 코드다.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