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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본능, 추월 본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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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예상했던 1등보다 예상치 못한 1등의 감격은 더 큰 법!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보여준 한국 빙속의 약진은 감동을 넘어선 감격 그 자체다. 빙속 500m에서 보여준 모태범, 이상화의 ‘질주 본능’과 빙상 최강국 네덜란드 선수마저 한 바퀴나 추월한 이승훈의 ‘추월 본능’은 보는 이들을 거듭 놀라게 했다. 세계도 놀랐지만 진짜 더 놀란 건 우리 자신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올림픽 빙속에서의 쾌거를 차분히 들여다 보면 몇 가지 변화의 동인을 발견하게 된다. 비인기 종목이었던 빙속에 대한 대기업의 지속적이고 아낌없는 지원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쇼트트랙의 섬세한 코너링과 빙속의 질주력을 결합시킨 ‘한국적 스케이팅 주법’도 주목할 대목일 게다. 물론 오랫동안의 지옥훈련을 묵묵히 견뎌낸 우리 선수들의 근성 또한 단단히 한몫했으리라. 하지만 더 의미 있게 볼 것은 ‘겁 없는 그들’의 질주 본능과 추월 본능에 담긴 놀라운 긍정의 에너지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올림픽에서 최대의 이변(異變)과 파란(波瀾)을 몰고 온 한국 빙속 쾌거의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자고로 잘하는 사람 위에 이기는 사람이 있고, 이기는 사람 위에 즐기는 사람이 있다. 세계를 경악하게 하고 우리마저 놀라게 한 한국 빙속의 겁 없는 삼총사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은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난 시대의 헝그리 정신과 악바리 근성으로 무장한 채 이 악물고 해대던 ‘하면 된다’의 인간형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삶에 대한 놀라운 긍정의 힘을 바탕으로 즐기면서 하는 ‘하면 되지 뭐!’의 인간형이다. ‘하면 된다’의 인간형은 어딘가 떨칠 수 없는 한(恨)과 콤플렉스가 있다. 그러나 ‘하면 되지 뭐!’의 인간형은 쿨하고 당당하다. 하다가 안 돼도 “그 까이거~”라고 자위하거나 “아니면 말고~”라며 쿨하게 되받아친다. 그래서 삶에서든 경기장에서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고 결국 해낸다.

# 한체대 07학번 동기생들인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에게 경기장은 메달의 한이 서린 곳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끼를 맘껏 발산할 무대였다. 올림픽 무대에 다섯 번 출전했지만 끝내 메달 사냥엔 실패했던 선배 이규혁이 “안 되는 것을 도전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고 말하며 눈물짓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물론 이규혁은 최고의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이기려고 몸부림쳤을 뿐 즐기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 이익환 선생 때부터 도전해 온 올림픽 메달에 대한 뿌리 깊은 미련이 오히려 마음의 족쇄가 되었을지 모른다.

#누군들 인생에서 달리고 싶지 않겠나. 누군들 상대를 추월하는 짜릿함을 맛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달리고 싶어도 주저앉게 만드는 숱한 장애와 함정이 우리 삶 곳곳에 지뢰처럼 포진하고 있기에 맘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추월하겠다는 욕심만 앞세우다 상대에게 되레 보기 민망할 만큼 번번이 추월당한 기억도 숱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은 이렇다. 진정한 질주의 힘과 추월의 에너지는 기필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각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즐길 때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즐김은 밑바탕에서부터 차오른 스스로에 대한 무한대의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 한국 빙속의 겁 없는 삼총사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의 질주 본능과 추월 본능을 보건대 대한민국, 아니 대한국민의 유전자가 바뀌었다. 몸의 유전자가 아니라 마음의 유전자가 바뀐 것이다. 그들에겐 패배의식도 피해의식도 그 어떤 콤플렉스도 없다. 아무리 큰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그들은 즐기면서 삶과 경기의 고비고비를 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메달을 휩쓸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제 우리도 긍정의 에너지에 의지해 오히려 힘들수록 즐기면서 내 안의 질주 본능과 추월 본능을 깨우자. 그리고 휩쓸리기보다 휩쓸며 가보자. 빙속 삼총사가 그랬듯이.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