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야기] 결혼도 동거도 아닌 '제3의 길' 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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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여성잡지 기자인 마리 루(27)는 2년째 동거 중인 장 마리(33)와의 장래 문제로 고민이 많다.

재무부 공무원이고 가문도 괜찮은 장 마리가 정식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기를 원하지만 그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수차례 다퉜던 이들은 최근 결혼도 동거도 아닌 '제3의 길' 을 선택키로 합의했다.

이른바 '연대 민권 계약' , 줄여서 팍(Pacs)이라고 부르는 제도가 그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남녀(또는 동성 커플)가 동반자 관계를 맺는 데 있어 결혼과 동거 외에 팍이라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서류화된 계약결혼' 쯤으로 번역될 팍은 결혼과 동거의 중간형태인데 결혼보다는 책임이 덜 따르고 동거보다는 강한 유대를 형성한다는 게 특징이다.

성당과 시청에서 혼인식을 두번 해야 하는 결혼과는 달리 팍은 양자가 서명한 계약서를 법원에 제출하면 부부로서의 효력이 발생한다.

모든 가재도구는 결혼 때처럼 양자의 공유재산이 되고 주택 등의 소유권을 어느 한쪽이 갖길 원하면 팍 계약서에 명기하면 된다.

팍은 또 각종 세제 혜택을 받는 장점이 있다. 과거엔 동거가 개별과세 때문에 절세수단으로 애용돼 왔지만 이제는 세금공제에 상한선이 많이 생겨 별로 유리한 것도 없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결혼 대신 동거나 팍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헤어질 때를 고려해서다.

프랑스에서 결혼한 부부가 헤어지려면 합의이혼(55%)일지라도 결혼 6개월이 지나야 가능하다.

수속기간만 최소 4개월이 걸린다.

결혼한 4쌍 중 1쌍이 이혼하는 마당에 "만나면 헤어질 때를 준비한다" 는 말이 결코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팍은 보따리만 싸면 남남인 동거와는 다르지만 어느 한쪽이 법원에 계약 파기서를 제출하고 상대에게 그 사실을 등기우편으로 통지하면 끝이다.

팍은 1999년 11월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약 3만쌍이 등록했다. 프랑스에선 지난 한해 28만5천쌍이 결혼했다. 동거부부는 2백50만쌍으로 추정된다.

동거보다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좀더 책임감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도 결혼으로 완전히 묶이기를 싫어하는 프랑스인들이 찾아낸 해결책이 바로 팍이다.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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