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교과서로 읽혀야 할 KSS해운의 社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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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누렇게 바랜 책갈피마다 쳐놓은 밑줄이 감회를 새롭게 한다.

1979년 발행된 백낙청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군에서 제대한 뒤 공허해진 내 머리 속에 '이것이 제대로된 사유이자 글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성큼 다가섰던 책이다.

잦은 이사 때마다 챙겨뒀던 이 '평론집 이상의 평론집' 을 다시 꺼내 한참을 뒤적여서야 문제의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구적 맥락속의 이상주의(理想主義)란 것의 허와 실에 대한 어퍼컷 한 방이 지금 읽어도 매우 인상적이다.

"좀더 나은 미래를 그린다는 소박한 뜻에서의 이상(理想)은 우리가 버릴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서구에서 현실에 대한 이상 내지 이상주의의 위치는 영미식의 양당정치와 비슷하기도 하다.

즉 주어진 현실에 어느 정도 비판적이지만, 그 주요기능은 기존현실에 봉사 - 협조하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이 기존 현실주의와 다를 뿐이다. " (1백쪽)

이 대목은 그가 옹호하는 문학이념인 민족문학의 리얼리즘이 이상주의류(流)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설명. 백낙청은 이상주의를 용도폐기한 뒤 아연 '사명' 을 내세운다.

'현실과의 샅바싸움 속에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는 양심의 진지한 발현' , 그것이 바로 사명이라는 얘기다. 솔직히 알 듯 모를 듯했던 말이다.

한데 20년이 넘은 최근 중소업체 KSS해운의 사사(社史)『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킨다』(비봉출판, 본지 1월 13일 37면 리뷰)를 읽으며 비로소 내 머리 속이 환해지는 경험을 했음을 고백한다.

즉 이 사사의 기록은 무엇보다 '진흙탕 기업문화' 현실과의 샅바싸움에서 얻어진 리얼리즘(현실주의)의 승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회사의 투명경영을 '이상을 앞세운 도덕 집단의 승리' , 그 이상의 메시지로 읽어야 옳다.

즉 그들 KSS해운은 선원들의 밀수와 리베이트 수수, 그리고 이중장부 등 온갖 '관행' 을 지속시킬 경우 이윤 창출은커녕 장기적으로는 기업활동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그 정반대의 길 만이 유일한 현실적 선택이자 '사명' 이었음을 리얼하게 각인시켜 준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KSS해운의 원칙 경영이야말로 한국적 신상(紳商), 즉 선비의 경영정신의 모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실은 그 이상이다. 한국적 자본주의 정신의 창출 가능성, 그것까지도 이 책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막스 베버가 개신교 윤리에서 자본주의 정신을 이끌어냈듯이, 어떤 뜻있는 학자가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KSS 박종규 회장의 '신상(紳商)경영 사례' 에서 탈(脫)천민자본주의 이념의 정립 가능성까지를 짚어낼 수 있다고 본다.

흥분한 것이 아니다. 비약일 수도 없다. 어제 오늘 기초 다지기 캠페인에서 가장 적실성(適實性)이 높은 텍스트가 바로 이 사사이다.

문제는 한국에는 왜 눈밝은 학자가 없는가.

이 책의 사례연구를 제대로만 읽어도 우리 사회가 목말라하는 한국적 기업윤리의 이념이 버젓하게 제시될 터인데… 어쨌거나 우선 이 단행본을 국민적 교과서로 읽자는 제안을 거듭 확인한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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