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풀죽은 국책연구기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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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때는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중립적 입장에서 정책 대안을 당당하게 제시하는 보람이라도 있었는데…. "

한국개발연구원(KDI)관계자의 푸념이다. 그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로 옮기려고 요즘 보따리를 싸고 있다.

국책 연구기관들의 싱크탱크 기능이 약해지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공공부문 개혁을 위해 국책 연구기관들을 총리실 산하의 연합이사회로 끌어모았지만 후유증이 적지 않다.

지난해 KDI가 생산한 연구보고서는 4백건, 산업연구원(KIET)의 보고서는 1백20건으로 줄었다. KDI 관계자는 "지난해 말 재정경제부가 산업은행의 회사채 신속 인수제도를 결정할 때도 KDI는 파장을 분석하는 별도의 보고서조차 만들지 않았다" 고 말했다.

인력 구조조정과 함께 경쟁원리를 도입함에 따라 1인당 업무량은 늘었다. KIET의 경우 지난해 1인당 연구보고서 작성건수는 1.06건으로 5년 전의 3배로 증가했다. 차분히 앉아 경제흐름을 짚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KIET 관계자는 "연구기관 성적을 보고서 건수로 평가하니 연구보고서의 질보다 양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고 털어놓았다.

정부가 예산 지원을 줄이자 국책 연구기관들은 돈벌이가 되는 자체 사업에 매달리고 있다. KDI는 지난해 정부에서 1백81억원의 예산 지원을 받고 나머지 58억원은 연구용역으로 벌어들였다.

KDI측은 "58억원 중 정부 부처에서 따낸 정책용역비는 20억원 남짓이고 38억원은 대부분 공기업의 컨설팅 대가로 받은 것" 이라고 밝혔다.

KIET 관계자도 "장기적 안목에서 연구하기 보다 당장 돈이 되는 3~6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에 신경쓰다 보니 정책에 대한 의견 제시는 적어질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국책 연구기관들이 연봉제를 도입한 데 이어 지난 29일에는 KDI가 고용계약제를 채택했다.

KDI측은 "예산 지원이 줄어듦에 따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 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KDI의 한 연구위원은 "솔직히 자리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며 "요즘에는 외국 일류 대학에서 학위를 딴 사람들이 국책 연구기관에 오길 꺼려한다" 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연구인력의 탈출은 꼬리를 물고 있다. KDI에선 지난해 부원장이었던 엄봉성 선임연구원이 벤처기업으로 갔고, 구본천.강영재.김영진 박사 등이 일반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KIET에서도 박사 인력의 3분의1 이상이 떠났다.

이런 가운데 정부부처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재경부의 한 국장은 "그전에는 산하 연구기관이라서 프로젝트를 맡기기 편했는데 지금은 돈 문제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어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고 말했다.

진념 경제부총리도 30일 민관 경제연구소장과의 오찬에서 "정부가 정책의 핵심을 만들면 국책 연구기관들은 제대로 지원하지 않고 정책 비난 등 뒷다리만 잡고 있다" 고 서운함을 표시했다.

陳부총리는 "산업자원부가 최근 7개 업종 빅딜을 제안했는데 연구기관들이 빅딜에 대한 기초조사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정부와 국책 연구기관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면서 마찰을 빚는 경우도 늘고 있다. 기획예산처는 "연구기관의 중립성이 제고되는 것" 이라고 평가하지만 전문가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

조세연구원 관계자는 "싱크탱크는 앞으로 발생할 문제점을 예측해 사전에 예방하는 기능이 크다" 며 "지난해 일어난 정부와 연구기관들의 마찰은 정책이 결정된 뒤 벌어진 사후(事後)논쟁일 뿐" 이라고 지적했다.

조직이 흔들리면서 연구기관 내부의 갈등도 표면화하고 있다. 특히 외부에서 정치권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낙하산 인사로 들어온 곳일수록 그렇다.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KDI의 성소미 연구위원은 "KDI 내부에는 외국 싱크탱크처럼 연구기금을 마련해 독립성을 높이자는 기류가 있다" 고 말했다.

KIET측은 "현실을 감안하면 정책 대안제시라는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차라리 예전처럼 정부가 예산을 전액 지원하는 형태로 돌아갈 필요도 있다" 고 말했다.

이철호.차진용.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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