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여론 외면하는 여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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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배 사회부 기자

중앙일보가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13가지의 상황을 상정해 현행 국가보안법과 열린우리당의 형법 개정안에 대입해 비교한 것은 법 시행에 따른 혼선을 사전에 막아보자는 취지였다.

20여명의 전문가 그룹에 자문한 결과 여당의 형법 개정안에는 상당한 허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촘촘해야 할 법망은 느슨했고, 형법의 기본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열린우리당은 즉각 본지 보도 내용에 대한 자신들의 법률적 논거를 주장했다.

어차피 국가 중대사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만들자는 시도였으므로 보도 내용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낸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실망스럽다"는 게 검찰과 법원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여당은 상당수 항목을 내란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판사와 검사들은 "법 적용을 모르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

법을 적용하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판사와 검사다. 자문에 응한 판.검사 20명 가운데 18~19명이 '어렵다''불가능하다'는 사안을 정치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80% 정도가 13가지 항목에 대해 처벌할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보안법이 폐지되더라도 국가안보를 보장할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1989년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선의에서 개정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전세대란'을 불러일으켜 서민들에게 큰 고통을 준 것은 사전에 철저한 '도상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언론의 공연한 불안 조성''이념논쟁'이라며 애써 외면하고 형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기보다 법 적용 기관과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사안인 만큼 좀더 견고한 '안보형사법'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전진배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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