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피플파워 "이젠 하나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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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이 필리핀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20일은 공교롭게도 필리핀을 식민통치했던 미국의 43대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날이었다.

식민과 독재 청산으로 고단한 20세기를 보낸 필리핀이 마치 21세기에는 한때 통치국가였던 미국과 동등한 위치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우연이었다.

시민의 피가 아닌 함성으로 1986년 페르디낭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청산한 데 이어 다시 한번 ‘피플 파워’로 부패한 최고권력을 몰아낸 필리핀은 이제 부패 척결과 경제 재건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이 임무는 전적으로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력에 달려 있다.

아로요 대통령은 일단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도박 ·술친구들에 둘러싸여 검은 돈을 쉽게 긁어모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이같은 부정한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만연한 부패를 몰아내는 적임자로 인정받고 있다.

또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상원에서 여러 경제관련 입법에 참여했던 경력도 아로요 대통령이 오늘의 필리핀 경제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믿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낙관적인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패 청산이든 경제살리기든 국민적 통합이 우선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아로요의 정치력으로는 국민 통합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여성인 아로요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빈민층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제2의 ‘피플파워’를 주도한 학생 등 시위대들은 마닐라 등지에서 에스트라다 축출을 축하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저소득층들은 여전히 에스트라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있다.에스트라다의 사임 후에도 국론 분열이 치유되기는 커녕 오히려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빈민층들은 “(부유층 출신인)아로요 대통령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며 “빈민층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빈곤층과의 충돌은 자칫 경제회생에 있어 필수조건이 개방정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특히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필리핀에 계속 머무르기로 한 것도 아로요에게는 큰 부담이다.에스트라다 처리 과정에서 부자와 빈자 사이의 극한 갈등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로요 대통령의 취약한 권력기반도 필리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정치 분석가들은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에 오른 아로요는 독자적인 권력기반이 없어 ‘약한 대통령’ 신세를 면하기 어려워 피리핀 정정 불안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반감으로 시민들이 아로요의 손을 들어줬을 뿐 아로요를 직접적으로 지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적 여정이 험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이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기도 조사 결과 20%만이 “아로요가 에스트라다보다 나을 것”이라고 대답해 이같은 분석이 기우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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