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몰린 에스트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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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반 에스트라다 진영을 이끌고 있는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이 19일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제안한 조기 대선 실시를 거부한 것은 에스트라다의 즉각 사임을 받아내 민중혁명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아로요 부통령은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국가를 통치할 도덕적 권위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정부를 잃어버렸다" 며 "이제부터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한다" 고 선언했다.

에스트라다는 아로요 부통령의 선언이 나오기에 앞서 쿠데타 우려 속에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새로운 통치자만이 국론 양분화를 치유할 수 있다" 며 5월에 조기 대선을 실시할 것을 제안했으나 즉각적인 사임은 거부했다.

지난해 12월 시작한 탄핵재판으로 위기에 몰렸던 에스트라다는 17일 상원이 재판을 무기 연기하면서 일단 위기를 넘긴 것으로 보였지만 이날 군부가 등을 돌리는 바람에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전역 후에도 군부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육군사관학교 1962년 졸업생들은 이날 대통령 퇴임을 촉구하면서 군 장성들에게 "위기 시기에 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정국을 결정적으로 돌려놨다.

이 성명이 나온 후 수도 마닐라로 통하는 주요 도로에 군병력이 집결하면서 18일부터 떠돌던 쿠데타 설이 더욱 폭넓게 확산됐다.

그러자 에스트라다는 중지됐던 자신에 대한 탄핵 재판을 재개하고 자신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비밀계좌를 탄핵검사들이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며 한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이날 오후 앙헬로 레예스 육군 참모총장과 오를란도 메르카도 국방장관, 해군.공군 사령관 등 군 수뇌부가 에스트라다의 사임을 요구하자 사태는 완전히 기울었다.

이들은 사임을 발표하고 곧바로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장관들의 사임도 잇따랐다.

레예스 참모총장은 시위대에게 "군은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을 지지하기로 했다" 고 말했다. 그는 "에스트라다 대통령과 가족들이 품위있게 물러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에스트라다가 미국으로 망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마닐라에 돌자 대통령 대변인 마이클 톨레도는 "망명은 의논된 적이 없으며 대통령은 필리핀을 떠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날 대통령궁 주변엔 에스트라다가 경비용으로 부른 것으로 보이는 장갑차들이 오가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날 사임한 앤드루 곤잘레스 교육부 장관은 "에스트라다와 접촉하려 했으나 (대통령궁은)완전히 요새였다" 고 말해 경비가 강화됐음을 시사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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