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따질게 따로 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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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렵다고들 하면서 모르는 사이 우리네 생활수준은 높아졌고 해외 나들이도 늘어났다.

하지만 안목은 하루아침에 높아지는 게 아니어서겠지. 낯선 곳에 가면 괜히 위축되고 어색하다.

속은 것 같기도 해서 모처럼의 여행이나 외식 기분을 망칠 때가 더러 있다.

한데 지난번 빈에서 열린 세계 정신의학회.오페라 하우스에서, 사회자의 익살을 듣고 나니 한결 위안이 되었다.

"한가지 충고를 드리지요. 비엔나 카페에선 이름이 길거나 낭만적인 커피는 시키지 마십시오. 길고 멋이 있을수록 값만 비쌀 뿐 맛은 같습니다. "

과연 빈엔 카페도 많고 커피 종류도 많았다. 여행객 입장에선 기왕이면 좀 색다른 커피를 시키고 싶다.

메뉴판엔 멋있는 이름이 즐비하다. '달빛에 젖은 입술' '빈 숲속의 연인들' '다뉴브의 푸른 파도를 타고' 등…. 주문을 받은 웨이터가 열심히 적는다.

그리곤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 석잔" 하고 외친다. 손님이 무얼 시키든 커피는 같다는 이야기다. 그저 값만 비쌀 뿐이다.

이런 일은 빈만이 아니다. 세계 유명 관광지는 어디서나 비슷하다. 어수룩한, 그러나 어딘가 색다른 분위기.멋.맛을 찾는 여행객의 기호에 맞춘 기막힌 상품이다. 맛이 없다고 불평해야 소용없다.

우리 집 커피 맛이 원래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두 번 찾아 올 것도 어차피 아니다. 그리고 대개의 손님들은 그러려니들 하고 즐겨 마신다.

여행의 신기한 흥분에 들떠 이것 저것 따질 계제도 물론 아니다. 멋으로 마시고 분위기에 취한다.

손님의 혼을 빼기로는 칵테일도 그렇고 와인도 마찬가지. 요즈음 우리 나라에도 괜찮은 식당에선 이런 요사스런 이름의 메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좋아 시키는 거지 어떤 게 나올지, 어떤 맛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어떤 걸까 궁금해하며 기다리는 맛도 짜릿해서 좋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무얼 시켜야 할지 난감하다. 출입깨나 하는 세련된 친구도 주문하기에 영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마치 중국 음식점에 간 기분 같다. 자장면 등 기본 몇 가지를 제외하곤 중국 요리 제대로 알고 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요리가 고급일수록, 즉 값이 비쌀수록 점점 오리무중이다. 와인도 골치다. 무얼 마셔야할지, 색깔 선택부터가 어렵다.

이런 행복한 고민은 나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난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다. 우선 주머니 돈을 계산하면서 값부터 맞춘다.

그리곤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른다. 어차피 모를 바엔 이름이라도 마음에 들어야지. 지옥, 예수의 웃음이란 포도주도 시켜본 적이 있다.

산지가 캘리포니아여서 미국 형제들을 생각하며 마신 적도 있다. 스페인에선 내가 좋아하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신 걸 시켰다.

맛이 좀 싱겁긴 했지만 이 술잔을 들고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한결 운치도 있고 맛이 좋았다.

전문가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나로선 이런 방법밖에 달리 실력이 없다. '첫 사랑의 키스' . 얼마나 달콤하고 낭만적이냐. 한데 막상 칵테일 잔을 든 친구가 상을 찌푸린다. 쓰다는 것이다. 값도 만만찮은데 속았다고 울상이다.

"이 친구야, 첫사랑 해봤지? 그때를 생각하며 마시라고. 짜릿한 아픔이, 그리고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올 걸세. 그 맛으로 마시는 거야. 그리고 첫사랑은 원래 쓴 거야. 옳게 됐는데 뭘 그래. "

세상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게 많다. 가령 호텔 아침식사만 해도 그렇다. 집에서 국밥 한그릇 훌떡 해치우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비싸다.

하지만 그래도 형편이 되면 호텔에서 먹는 아침이 낫다. 우선 분위기부터 다르다. 널찍한 공간부터가 시원하다. 사람 구경도 괜찮다.

좋은 음악에 친절한 서비스에, 새로운 맛하며, 이런 것들은 값으로 따질 일이 아니다.

너무 따지지 말자. 속았다 싶은 기분이 계속 든다면 당신 인생이 그리 멋이 있다고 할 순 없다. 따질 게 따로 있다. 분위기로 먹고 마시고, 분위기에 취하는 거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상상을 하자. 여행길이든 혹은 일상에서든 때론 이런 사치도 생활의 액센트가 돼준다.

신선한 자극제요, 청량제다. 거기다 무슨 값을 따지랴.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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