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정치 手읽기] 대마 사활 건 '빈삼각 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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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안기부 예산을 횡령한 것이냐, 아니다, 구 여권 비자금이다."

"비밀의 키를 쥔 강삼재(姜三載)의원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

안기부 총선자금 지원에 대한 검찰 수사로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칼자루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잡고 있었다.

그 때 李총재는 "DJP공조 등 인위적인 정계변화는 꿈도 꾸지 말라" 며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을 압박했다. 경제 전망은 어둡고 개혁의 시한은 박두해 DJ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金대통령은 빈삼각의 우형(愚形)도 마다하지 않는 치열한 몸싸움으로 정면돌파에 나섰고 그 순간 상황은 예상 외의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3金1李 정국' 이 열리면서 4자간 합종연횡(合縱連衡)의 수읽기가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金대통령은 '법치' 와 '강한 정부' 를 내세우며 직선 돌파로 나왔다.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 는 세간의 비관적 분위기를 일축하는 강인한 승부수였다. '의원 임대(賃貸)' 는 보기 흉한 우형의 행마임에 틀림없는 데도 욕먹기를 각오하고 DJP공조를 이뤘다.

한나라당과의 손잡기는 모양은 근사하지만 실상은 고삐잡힌 말 신세일 뿐이라는 판단이 이면에 깔려 있다. 민심이 바닥을 쳤다고 느끼자 오히려 결심이 편해졌는지도 모른다. 성패는 최종적으로 경제가 말해줄테니까 힘을 모아 여기에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다.

JP(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동정권' 이란 옛집으로 돌아왔다.

민주당의 위기와 사람들의 망각이란 절묘한 타이밍이 그를 다시금 정치의 중심부로 밀어올렸다. "궁할 때는 손을 빼라" 는 기훈(棋訓)에 따른 것이 결과적으로 약이 된 것일까.

JP는 李총재를 맹공하면서도 여백을 남기고 있고, 멀리 YS(金泳三 전 대통령)에게도 미소를 던진다. 심오한 듯 모호하고, 투박한 듯 노련한 행마법으로 그는 슬슬 정치판을 굽어보는 사두(蛇頭)에 접근하고 있다.

유리한 형세를 음미하며 조심스레 '대세론' 으로 승세를 굳히려던 李총재는 어느 순간 등뒤를 엄습해온 두개의 칼날에 맞서고 있다. 분노를 터뜨리며 'DJ비자금' 으로 반격을 시도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수비자세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당료들이 체포되는 상황에서 흙탕물을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생존을 건 극한 투쟁을 주장하는 당내의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강삼재 의원 문제는 혈전이 예고되는 대형 사활문제다.

YS가 대신 싸워준다면 이상적인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게 구차스럽다. 이 상황을 잠재우며 순조롭게 대선으로 가는 최선의 수순은 무엇일까. YS는 겉으론 위기이면서 속으론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YS는 한국 정치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온몸으로 대변한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며 DJ와의 전면전을 선언했는데 다치지만 않는다면 이 싸움을 오래 끌수록 YS의 입지는 탄탄해지게 된다.

YS는 그래서 전면전 대신 보따리를 하나씩 천천히 풀면서 부산 민심과 정치권의 풍향을 살피고 있다.

DJ는 이런 YS를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3金' 이란 표현 자체도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던진 강수는 싫든 좋든 '3金1李' 라는 정국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팬터지의 세계에선 흔한 일이지만 현실의 승부세계에서 흘러간 강자들이 부활하기란 고목나무에 꽃을 피우기보다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그건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는 팬터지의 세계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연의 법칙 쪽으로 갈 것인가. 그게 궁금하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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