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 의심받던 파키스탄 종교인 ‘신분세탁’입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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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형의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고 본인의 사망진단서까지 발급받아 ‘신분 세탁’을 한 뒤 국내에서 종교인 활동을 해 온 파키스탄인이 경찰에 구속됐다.

21일 경찰청 외사수사과는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A씨(31)를 구속했다”며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인 탈레반과 연관이 있다는 제보와 진술이 있어 지난주 대구에 있는 A씨의 집과 이슬람사원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A씨가 국내외를 드나든 경로를 추적하면 외국인 출입국 관리 시스템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A씨는 2001년 자신의 이름으로 단기 비자를 받아 입국한 뒤 불법 체류자로 있다가 2003년 6월 강제 출국당했다. 그해 8월, A씨는 형(36)의 이름으로 된 여권으로 재입국했다. 당시 국내에는 1년 이상 거주 외국인의 지문을 받아 보관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단기 체류 자격으로 다시 들어와 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연말,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는 폐지됐다. 그는 대구의 이슬람사원에서 이맘(종교 지도자)으로 일하며 장기 체류 자격을 얻었다. 이후 부인과 자녀 6명도 입국했다. 형의 이름으로 완전히 신분 세탁한 그는 17회나 국내외를 드나들었다.

2007년 A씨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사망진단서를 보이며 신분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했다. 사망진단서 역시 파키스탄에서 정식으로 발급한 것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파키스탄인 중장비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이 사건과 관련돼 A씨가 경찰에 소환됐다. 주변에서 “평소에 탈레반의 지령을 받고 한국에 왔다고 말하고 다니며, 젊은이들을 모아 극단적인 이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경찰에 접수됐다. 경찰이 국과수에 2001년 여권 사진과 형 이름으로 된 여권을 정밀 감정해 달라고 요청한 결과 ‘두 사람이 동일 인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테러리스트가 이런 식으로 국내에 들어와도 현재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며 “미국과 일본과 같은 외국인 지문 등록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A씨같이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어 국내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테러리스트가 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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