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회색과 분홍빛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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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니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머리를 붉게 물들인 한 아가씨가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갸웃거리고 있다.

각양각색의 신발이 진열된 쇼윈도 앞에서 끊임없이 고갯짓을 반복하고 있다.

몇걸음 다가가 그녀 뒤에 선다. 도대체 어떤 기막힌 신발이 그녀의 고개를 그토록 갸웃거리게 만드는지 보려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날씬한 몸매, 터프한 헤어스타일의 이 아가씨에게 신발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온신경은 어떤 식으로 머리카락을 양쪽 귀 위에 늘어뜨릴까에 모아져 있었으니까.

궁금증이 풀리면서 나는 오후 6시30분, 서울의 젊은이들이 몰리는 동대문의 상가 밀집거리를 다시 걸어간다.

유행과 때로는 아방가르드의 신전인 신축 고층빌딩 사이, 울긋불긋한 의상과 요란한 몸짓으로 상징되는 그룹가수들을 맞을 준비가 된 스폿라이트로 덮인 무대, 건물 지상층, 지하층…. 모든 것이 진행형이고 움직이고 살아 숨쉬고 있다.

이곳에는 어김없이 고등학생 무리가 있다. 몸에 맞지 않는 교복을 입고 있다. 교복이 몸에 맞지 않는 것은 집안 사정이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옷값이 매우 비싼 탓이다.

지나칠 정도로. 따라서 한 해에 한 벌씩 사기란 힘들다. 고등학교는 3년. 3년 사이 학생들은 많이 자란다. 앞을 내다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성장을 염두에 둔 탓에 교복은 처음에는 너무 크고 나중에는 예측을 정확히 못한 까닭에 너무 작다.

바지는 단을 접어 그런대로 잔꾀를 부린 걸 감출 수 있지만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상의 소매는 너무 길어 손을 덮거나 몇 번이고 걷어올려야 한다.

한국학생들이 늘 그룹을 지어 옹기종기 붙어 다닌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늘 그렇게 떼를 지어,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치 동물의 무리처럼 몰려다닌다. 교복은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독창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여학생들의 쥐회색 긴 주름치마와 남학생들의 감청색 상의는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의 활기 없는 옷차림은 동대문의 쇼윈도와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왜냐하면 이곳은 색상의 중심부 중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진열된 모든 옷들은 공연히 요란스럽고 극단적으로 야해 과연 저걸 누가 입을까 싶을 정도다.

점잔을 차리기엔 너무 짧거나 상식 밖으로 긴 치마, 속옷과 구별이 안되는 바지들의 소재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플라스틱, 종이-이거 종이 맞아?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인조가죽,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합성섬유들…. 건물 안 상점들은 2㎡ 남짓한데 수도 없이 많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가게들이 즐비하다. 좁은 통로는 사람을 헤치고 지나가야 할 정도고 주말 인파는 교통난이 극심한 네거리의 자동차 혼잡에 못지 않다.

때문에 교복을 입은 회색무리는 자주 투덜대면서 발걸음을 돌리다 화려한 옷차림, 세련된 스타일의 의기양양한 귀공자 타입의 고교생과 마주치자 입을 딱 벌린다.

동대문은 부유층 젊은이들의 새로운 집합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은 마지막 수업종이 치고 나면 화장실로 달려가 무거운 교복을 벗어 던지고 머리엔 1.5㎏쯤 되는 젤을 바르고 반지와 귀고리로 치장하고 마치 클라크 켄트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슈퍼맨으로 변해 나오듯 탈바꿈해서 등장한다.

그들의 책가방 속엔 매년 새로 사입는 몸에 딱 맞는 교복이 둘둘 말려져 들어 있다. 그들 호주머니 또한 결코 궁색한 적이 없다. 오늘 저녁 그들은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한 뒤 쇼핑을 마치고 나면 아마 PC방으로 갈 것이다.

고등학생들은 오랫동안 벌리고 있던 입을 천천히 다문다. 부티 나는 그 친구는 번개처럼 지나가고 학생들은 그를 두고 한참동안 이야기한다.

부정적으로? 천만에. 그들의 이야기는 찬미로 가득 차 있다. 그를 부러워하지만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전 지나간 그 친구는 학생들과 엇갈려 지나치면서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대놓고 아래 위로 훑어보았고 누가 봐도 '우리는 같은 부류가 아냐' 를 의미하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회색무리는 그런 것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고 그가 사라진 군중 속에서 그가 썼던 분홍색의 기상천외한 모자를 찾으려고 애쓴다.

브뤼노 카예티(서울프랑스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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