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경기에 발목 잡힌 기업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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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업의 부담을 덜어줘 경제살리기에 동참할 수 있도록 상반기에 한해 4대 그룹을 포함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를 자제하겠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4일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저인망식 조사 대신 신고가 접수됐거나 불법 혐의가 포착된 기업만 선별해 하겠다" 고 덧붙였다.

기업들이 마찬가지로 무서워하는 국세청에서도 비슷한 배려가 있었다.

지난해 11월 국세청은 대우자동차.동아건설 등의 법정관리로 어려움을 겪는 협력업체는 세무조사를 면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0월에도 4분기에 예정했던 기업과 개인사업자 5천여명에 대한 일반 세무조사와 주식 이동조사를 중단했다.

얼핏 보면 힘겹게 생존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업에 대한 정책 당국자의 사려깊은 배려같다.

몇개 회사를 묶어 일제히 진행하는 조사가 해당 기업에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기업들은 "공정거래위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받고 나니 담합.약관조사 등이 이어지고 국세청 조사까지 받으면 1년 내내 조사만 받을 수도 있다" 고 푸념한다.

공정위도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부당 내부거래.담합.하도급 등 필요한 조사를 한꺼번에 하고 정례화하는 등 노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의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감시하는 잣대를 경제상황에 따라 고무줄처럼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는 것일까. 정운찬 서울대 교수(경제학부)는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연기하거나 세무조사를 면제한다는 것은 경기를 의식한 것이겠지만, 관련부처에서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이란 점에서 직무유기에 다름없다" 고 지적했다.

당국의 조사때문에 기업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면 소리나지 않게 평소에 하면 된다. 지금부터 어디를 상대로 무슨 조사를 한다고 발표할 일도, 경기가 나쁘니 지금부터는 조사를 중단한다고 할 게 아니다.

경제가 좋고 나쁨에 따라 당국의 조사강도가 세지거나 약해진다면 한국에선 잘못된 행위에 대한 조사도 제도가 아니라 공무원의 재량에 좌우된다는 것을 스스로 널리 내외에 알리는 셈이 된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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