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산다는 것만으로 위대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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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철이는 뭐하나 똑똑한 걸 갖고 태어나질 못했다.

기형적인 가냘픈 팔 다리, 흐느적거리는 걸음, 둔한 머리, 그러나 머리통은 커서 아이들로부터 ET라고 놀림을 받는다.

때론 맞기도 한다. 그래도 반박은커녕 맞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다. 퍼렇게 멍든 자국에 울고 앉은 철이를 보면 또 화가 치민다.

"녀석아, 물어뜯기라도 하지. 왜 그냥 맞고만 있어?" 하지만 철이는 대들 힘도 용기도 없다는 걸 내가 왜 모르랴. 철이는 뭐하나 똑똑한 걸 갖고 태어나질 못했다.

기형적인 가냘픈 팔 다리, 흐느적거리는 걸음, 둔한 머리, 그러나 머리통은 커서 아이들로부터 ET라고 놀림을 받는다.

때론 맞기도 한다. 그래도 반박은커녕 맞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다. 퍼렇게 멍든 자국에 울고 앉은 철이를 보면 또 화가 치민다.

"녀석아, 물어뜯기라도 하지. 왜 그냥 맞고만 있어?" 하지만 철이는 대들 힘도 용기도 없다는 걸 내가 왜 모르랴. 그러니 더 화가 치민다.

거기다 위로하고 보살펴줄 부모마저 가까이 없으니 그저 하느님이 야속할 뿐이다. 도대체 이 아이는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이냐.

그러나 한편, 이러고도 여기까지 살아온 철이가 참으로 기특하고 용하단 생각도 든다. 울며 넘어지며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여기까지 살아온 게 가상하다.

저 연약한 몸에, 저 여린 마음으로, 철아, 넌 용케도 견디며 살아왔구나. 그것만으로 장하다. 그것만으로 위대한 승자다.

내가 철이에게 그 밀 한 포기의 힘을 이야기해준 건 그래서다.

미국 아이오와대 생물학 교실에서 한 실험이다. 작은 나무상자에 보리 밀 씨앗 하나를 심었다. 이윽고 싹이 트고 빈약하긴 하지만 조금씩 키도 자랐다. 키만 훌쭉 자랐지 몸집은 너무 허약해 볼품이 없었다.

실험팀은 통을 부수고 뿌리의 총 연장을 측정했다. 가느다란 모근까지 현미경을 동원해 모두 쟀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그 길이가 무려 1만1천2백㎞. 실험팀도 놀랐다. 서울~부산간 경부고속도로를 정확히 14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난 이 기사를 읽으며 '생명' 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비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그 밀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한치의 자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긴 뿌리를 모래 속으로 끝없이 뻗어나간 것이다. 그 긴 뿌리가 밀의 필사적인 투쟁을 웅변하고 있다. 기름진 땅에서 자란 혜택받은 밀이라면 이렇게 긴 뿌리는 필요없었을 것이다. 몇 가지만 땅에 내려도 충분한 영양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실 통속의 밀 한 줄기는 열악한 환경과 싸워 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 필사적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그런 목숨을 건 노력 없이는 말라죽었을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이다. 한 뿌리라도 더 멀리, 더 깊이 뻗어야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가혹한 운명과 싸워 이겨 말라죽지 않고 삶을 이어온 것이다. 그 필사의 노력 앞에 감탄이 절로 난다.

어떤 역경에서도 삶을 이어간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그리하여 살아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 그 생명체는 위대하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한 알의 생명체가 움트고 성장.발육하기 위해선 온 우주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짐짓 놀라게 된다.

지상으로는 나뭇가지, 잎을 뻗어 바람에 일렁이며 비를 맞고 태양을 받고, 땅속 깊이 뿌리를 뻗어 온갖 자양분과 물을 흡수한다.

온 우주의 어느 하나가 관여하지 않는 게 없다. 이 작은 생명체를 위해. 그래서 생명은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다.

실험실 통 속의 밀알처럼 저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도 있다. 난 철이를 보면서 운명이란 걸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막힌다.

철아, 어쩌면 너도 그런 사람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강해야 하는 게 또한 네 운명이다. 그 밀알의 뿌리처럼.

주어진 운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잘 사는 집에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걸 한탄 말자. 통속의 밀알은 결코 화원의 아름다운 장미로 태어나지 못한 걸 한탄하진 않았단다. 다만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철아, 너에게 지워진 운명은 참으로 가혹하다. 누구도 그건 부인 못한다. 너도 그리고 나도, 하지만 고맙게도 신은 너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주셨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튼튼한 생명력을 주신 것이다.

흐느적거리고 연약하고 볼품이 없어도, 그리고 괴롭고 슬퍼도 살아가야 한다. 이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마라. 온 우주가 너의 가냘픈 생명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신이여 우리 철이에게 용기를, 그리고 오늘을 힘겹게 사는 모든 한국인에게도. 그리하여 철이가 그리고 한국인이 왜 강한지를 보여주소서.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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