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공자의 애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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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위 대사는 감독의 창작이다. 하지만 전통 유교의 맹점을 정확히 꼬집는 구절로 이해된다. 공자의 어록인 『논어』의 키워드는 인(仁)이며 그 의미는 애인(愛人)이기 때문이다. ‘애인’은 남녀의 연인을 의미하는 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의 ‘동사+목적어’ 구조로 읽힌다. 지당하신 ‘공자님 말씀’으로 무심코 넘어가곤 했던 『논어』의 허를 영화는 찌르고 들어갔다.

공자와 남자의 만남은 『논어』에 나온다. “공자께서 남자를 만나시었다. 제자인 자로가 아주 기분 나빠했다. 공자께서 이에 맹세하며 말씀하시었다. ‘내가 만약 불미스러운 짓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날 버리시리라!’….”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역사적 사실로 인용된다. 그런데 이 구절은 해석이 분분했다. ‘성인(聖人) 공자’의 이미지에 자칫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를 신처럼 숭앙하려는 이들이 언급조차 꺼리는 장면을 영화는 과감하게 클로즈업했다. 오히려 실제 기록보다 섹슈얼 이미지를 강화했다. 중국인의 눈에도 이 같은 ‘인간 공자’의 묘사는 신선한 시도다.

공자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소개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영화는 지루해졌다. 이 장면마저 없었다면 더 재미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을 더 늘려야 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필자가 볼 때 이는 단순히 영화적 재미를 위한 장치 그 이상이다. 중국인이 이해하는 공자가 아닌, 한국의 역사에 누적된 ‘엄숙한 공자’를 연상할 때 특히 그러하다. 중국에서 공자는 20세기에만 두 번 죽었다. 한 번은 20세기 초반 서양의 근대문명을 배우자던 5·4운동 때였고, 또 한 번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문화대혁명 때였다. 망국의 원흉이자 단절해야만 하는 전통의 대명사가 21세기 들어 ‘인간 공자’와 ‘전략가 공자’의 모습으로 영화 안팎에서 부활하고 있다.

고전에 대한 ‘비틀어 보기’는 예술의 특권이다. 또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다. 중국에서 두 차례 극단적 비판의 경험이 역설적으로 해석의 성역을 없애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공자’가 전반적으로 잘 만든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한국인의 공자다. 조선 왕조 500년은 유교의 나라였다. 멋진 유교 영화 한 편 나올 때도 됐다. 우리에게도 퇴계·율곡 등 풍부한 고전 자원이 있다. 공자와 『논어』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고전을 비틀어 볼 자신감을 갖추고 있는지부터 되새겨 볼 일이다.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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