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능으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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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경주의 능으로 가는 길엔 유난히 소나무가 눈에 띈다. 주름살처럼 구불구불 굽이진 노송들과 그 뒤로 솟은 거대한 알 같은 고분들, 소설가 강석경은 그 무덤의 주인들이 품었을법한 꿈과 슬픔 그리고 세월의 미추(美醜)를 오늘과 접목시켜 작가의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이 책은 5년째 경주에 살고있는 소설가 강석경이 신라 천년의 고분 위에 수놓은 '흐트러진 무늬(散文)'이지만,가벼운 신변잡기의 나열은 아니다.

우리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각종 사료와 관련 논문의 인용 속에 녹아있다. 5년간 신라 공부의 결산인 셈이다.

고분을 산책하며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그려낸 무늬가 이 분야 전문가의 눈에는 다소 위험스러운 시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역사학자가 못보는 측면을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일단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동서양 문학과 영화 등이 종횡무진 인용되며 무늬를 더욱 화려하게 한다.

풀어진 가락을 일부 조율해주는 역할을 강운구의 사진이 맡았다. 천년의 세월속에 이제 자연과 하나가 된 고분의 사계절 풍광이 고스란히 렌즈에 잡힌다. 소설가와 사진작가가 함께 고분을 거닐며 연주하는 이중주를 들을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를 고증하는 작업은 아니기에 무덤의 주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작가의 손길은 자유롭다.

신라 왕들의 탄생설화와 일대기 그리고 당대 민중의 삶을 통해, 잊혀진 고도(古都)의 꿈을 집착, 고독, 여성, 아름다움 등 11개의 독특한 테마로 재해석한다.

석탈해 왕릉을 통해 철기문화의 전래를 소개하면서 전쟁과 평화라는 인류문명의 명암을 조명하고,헌강왕릉에선 집착을 벗어난 처용의 의연함을 통해 족보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오늘의 아집을 대비시킨다.

진덕여왕릉과 선덕여왕릉에서 현대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되돌아본 저자는 노동동 고분군에 이르러 최근 문제가 된 여성 연예인들의 비디오사건과 관련한 세태를 여성의 입장에서 통렬하게 꼬집는다.

하지만 천마총 등의 유물을 보고 신라인을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로 묘사하는 부분 등 단정짓기에는 아직 논란이 되는 부분들이 적지 않다.

유목민족의 유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경주의 역사속에서 인간 구원의 이상향을 찾고자 하는 저자의 빛나는 상상력은 관련 학계와의 의미있는 대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자산을 한층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90년 '인도기행'이후 10년 만에 산문집을 펴 낸 저자가 "40대의 마지막 해를 능으로 가는 길을 수행하듯 닦으며 보낸"그 경주에 지금 신라는 없다.

고대 신라인의 웅혼한 숨결을 맡기엔 도시화의 급물결이 너무 벅차다.

그것이 오늘 경주의 모습을 사랑할 수만은 없는 그녀가 "능을 돌아다니며 도대인들과 대화하고 자신만의 환상을 지킬 수 밖에 없는"이유일 것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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