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조심 산업스파이] 中. 해외로 새 나가는 기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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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산업스파이들이 정보가 모이는 길목을 노리고 있다.

스파이 수단도 교묘해졌고, 표적이 되는 정보도 훨씬 다양해졌다. 반도체 관련 첨단기술에서 공기업 민영화 계획.관급공사 수주 등 국책사업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국내기관의 느슨한 보안망을 비웃는 산업스파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국계 스파이들에 의해 국부(國富)가 해외로 새어 나가고 국내에서도 '한탕주의' 에 눈먼 스파이 행위가 늘어나고 있다. 피해 규모도 어림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피해를 본 연구소.민간기업들이 신뢰도 추락을 우려해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 국외로 새는 산업기밀〓지난 6월 A국책연구소가 지방자치단체의 의뢰를 받아 만든 첨단 정보통신 연구단지 건설계획. 그러나 완성된 보고서를 먼저 받아본 곳은 외국의 한 경제단체였다.

A연구소 연구원들이 외국의 경제단체에서 수주받은 '한국의 정보산업' 연구논문을 건네주며 보고서를 끼워 준 것이었다. 혈세 9천만원이 투입된 연구결과가 순식간에 새나간 것이다.

외국기업 지사가 스파이 전진기지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 한 외국계 무역회사는 국내 전자업체와 인연이 있는 한국인 소속 직원을 이용, 주요 기술도면 디스켓을 수개월째 훔쳐보다 꼬리가 잡혔다. 그러나 현행범이 아니라서 처벌도 못했다.

현재 1천여명에 이르는 국내 거주 외국인 과학자에 의한 정보 유출도 최근 두드러진 양상. 2년 새 이들이 저지른 기밀유출 사고는 적발된 것만 10건이 넘는다.

얼마 전 공항에선 모 기업 연구소의 동양인 과학자가 '멀티미디어 반도체 사업전략' 등 18건의 굵직굵직한 자료들을 훔쳐 귀국하려다 항공기 탑승직전 붙잡히는 아슬아슬한 장면도 연출됐다.

그런가 하면 '3차원 영상매체' 연구에 참여했던 외국인 과학자가 연구자료를 몽땅 빼내 국내 벤처업체 연구원으로 전직한 일도 벌어졌다.

협력업체 직원을 스파이로 활용하는 우회전략도 외국 기업체들이 즐겨쓰는 수법이다. 자동차 부품 전문 생산업체인 B사는 소속 직원이 평소 가깝던 협력업체 직원에게 부품 설계도를 무심코 넘기는 바람에 중남미 수출시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협력업체 직원이 외국 경쟁업체에 포섭된 산업스파이였던 것이다.

◇ 외국 스파이의 핵심인력 빼가기〓취재과정에선 정보를 빼가는 번거로움 대신 국내업체 핵심인력을 아예 통째로 빼내가는 시도들도 여러건 확인됐다.

최근 한 외국계 반도체 업체는 국내 경쟁업체의 주력 부품 제조과정에 깊숙이 관계한 핵심연구원 3명을 모두 빼내갔다.

외국 통신기기 생산업체도 국내 시장진출을 위해 국내 모 전자업체의 핵심기술 인력 6명을 9만~10만달러의 고액 연봉을 미끼로 스카우트했다.

관계 당국의 발빠른 대응으로 미수에 그쳤지만 지난해 말 한 외국계 반도체 업체가 국내 모 업체 연구원 15명에 대한 패키지 스카우트를 시도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 제살 깎는 국내기업간 정보유출〓기업퇴출과 신종 벤처 등 창업 붐을 타고 일부 회사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 는 '정보유출→퇴직→동종업체 전직 또는 창업' 이란 공식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 6월엔 모 중소기업 설계팀 직원이 경쟁업체에서 수천만원의 보너스 지급을 약속받고 회사 설계사무실에서 부품 설계도 3천여장을 훔쳐 회사를 옮겼고, 기계부품 전문업체의 기술직 직원이 1천만원의 기술유출 사례비를 보장받고 경쟁업체의 사무직 과장으로 자리를 바꿨다.

벤처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7월 한 인터넷 여행업체의 간부 직원은 저작권 등록까지 마친 항공편 예약.구매 시스템 프로그램을 훔쳐 새 회사를 차려 나갔다.

지난 10월엔 자신의 지도교수가 창업한 벤처회사의 기밀자료를 훔쳐 달아난 지방대 대학원생들이 검거되기도 했다.

일부 국책연구원들의 일탈도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9월 국가연구소의 산삼 관련 생명공학기술을 유출한 연구원들은 퇴사 직전 연구원 내부의 관련자료를 모두 삭제해 자료복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완벽한 뒤처리 솜씨를 과시했다.

해킹.e-메일 등을 통한 신종 스파이 행위도 잦아 지난 6월 모 벤처업체 기술개발팀장은 회사가 개발한 인터넷 접속 프로그램 등 15건의 핵심기술을 e-메일로 유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획취재팀=이상복.서승욱.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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