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브란트와 히로히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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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6일 폴란드를 방문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총리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옆에 빌리 브란트 전 서독총리가 무릎 꿇은 모습을 그린 부조를 제막했다. 그 앞 조그만 광장엔 '빌리 브란트 광장' 이란 이름이 헌정됐다.

"나는 독일역사의 나락에서, 그리고 수백만 희생자의 짐 아래서 인간의 말이 소용없을 때 행하는 것을 했을 뿐이다. "

1970년 12월 7일 쌀쌀한 월요일 아침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서독총리로는 전후 최초로 이곳을 방문한 브란트는 스르르 무릎을 꿇었다.

30초 동안 차가운 대리석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않던 그의 얼굴은 엄숙하다 못해 데드 마스크처럼 굳어 있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날 브란트는 그 어떤 사죄의 말, 그 어떤 보상보다도 감동적이고 절절하게 나치의 만행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흔히들 브란트를 '행동하는 양심, 용기 있는 정치가, 비전 있는 지도자' 로 부른다. 이는 당시 서독인들의 48%가 이날 그의 행동을 '심했다' 며 반대했고, 41%만이 '적절했다' 며 찬성한 시대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디 벨트지 같은 권위지까지 기사 없이 사진만 실어 당시 독일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할 정도였다.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다.

폴란드, 나아가 전세계에 대한 이날 브란트의 사죄는 그 자신이 추진한 동방정책(Ostpolitik)과 함께 훗날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된다.

과거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이같은 반성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의 열쇠를 쥐고 있던 주변국들, 특히 당시 소련이 그토록 선선히 통일을 용납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브란트가 통일 2년 뒤인 92년 서거했을 때 독일인은 물론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

다시 30년이 지난 2000년 12월 12일 일본 도쿄의 일본청년관. "히로히토(裕仁)는 인간의 노예화.고문.살인.인종차별을 비롯한 인도(人道)에 관한 죄를 범했다" 는 '여성국제전범 법정' 의 판결은 89년 사망한 일왕을 부관참시(部棺斬屍)하듯 전범자로 낙인 찍어 버렸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지존이라는 '덴노' 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비록 구속력 없는 국제 민간법정의 상징적 판결이긴 하지만 일본 정부나 일본인들은 상당한 부담을 느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브란트와 히로히토의 대접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누구보다도 일본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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