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교사이자 목사였던 고 차유황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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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버지, 정말 (죽음이)두렵지 않으세요. "

한일장신대 차옥숭(車玉崇.여)교수는 지난달 중순 암투병 중이던 아버지 차유황(車有晃)목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얼마전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하느님 나라가 곧 내 나라야. 수술이 잘못돼 뇌사상태에 빠지면 숨을 끊고 장기를 기증하라" 며 너무도 초연히 죽음을 맞고 있는 아버지였기에 그만 '철없는' 질문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자 車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車교수는 전했다.

"야, 임마. 너도 당해 봐라. 죽음이란 누구나 두려운 거야. 그냥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일 뿐이지. "

그로부터 3주일이 흐른 지난 5일. 車목사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라" 는 유언을 남긴 채 82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산이란 한 푼도 없고, 오직 유언 한마디를 남기고 떠난 그는 생의 대부분을 전북 삼례중.고, 줄포중 등 시골학교 교사로 보냈다. 철저히 무명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하지만 7일 열린 고인의 영결예배에서 오랜 친구인 강원용(姜元龍)목사는 "그의 삶은 경력만으로는 조명할 수 없는 어떤 향기가 있다" 고 강조했다.

그 향기는 어떤 색일까.

교사로서 그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열연했던 키팅 선생과 같은 인물이었다.

1960년대 중반, 매주 토요일만 되면 고인의 전주시 다가동 한옥집 다락방에는 인근 전주고.신흥고.전주여고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곤 했다. 이 모임이 바로 고인이 만든 고교연합 써클 '사마리탄' 이다.

사마리탄이란 '높은 분' 들은 외면해 버린 부상당한 행인을 소외받던 사마리아인들이 구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딴 것이다.

"사마리안처럼 정의로운 이웃이 되자" 는 게 모임의 취지다.

그는 다락방에서 학생들에게 역사와 철학을 가르쳤고, 명상과 고백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남을 자신처럼 사랑했는가' '시간을 귀하게 여겨 부지런히 일했는가' '민족과 동지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는가' 등이 주된 주제였다.

사마리탄은 70년대까지 이어졌고 배출한 회원만도 4백여명에 달한다. 연세대 정갑영(鄭甲泳)교수.청와대 김기만(金基萬)해외언론비서관.유연만(柳然滿)군산지원장 등이 사마리탄 출신들이다. 회원의 절대 다수는 고인의 뒤를 이어 교직에 진출했다.

그가 교육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30대에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파란만장한 삶과 관련이 있다. 車목사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은 민세(民世)안재홍(安在鴻)선생이었다. 그는 민세가 총무를 맡고 있던 신간회의 전북지회장을 맡았다. 姜목사와도 신간회에서 만나 평생 친구로 지내게 됐다.

45년 민세가 여운형.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자 고인 역시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분단과 한국전쟁이 뒤따랐다. 전쟁 중 몰아친 '매카시적 광풍' 속에서 그는 부역 혐의자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기독교인들의 구명 활동으로 석방되기는 했으나 사회활동에는 커다란 제약이 뒤따랐고 그래서 선택한 길이 바로 교육이었다.

그는 퇴임 후 62세에 한국신학대에 학사 편입해 목사가 됐다.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종교에 귀의해 있는 동안 그가 길러낸 많은 사마리탄들은 '제2.제3의 키팅 선생' 이 돼 그가 뿌린 '사랑의 홀씨' 를 각지에 퍼뜨려 왔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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