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천주교의 과거사 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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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12월 3일은 천주교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날 천주교 교회는 주교회의의 이름으로 '쇄신과 화해' 라는 문건을 발표하면서 전국의 성당에서 참회미사를 열고 한국 천주교가 2백여년 동안 저지른 잘못을 반성했다.

참회 내용은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항목이었다.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부화뇌동(附和雷同)했던 점, 민족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점, 남북 분단상황 극복에 소홀했던 점, 사회 내의 갈등해소와 소외된 자에 대한 보살핌이 부족했던 점, 올바른 가치관 확립을 위한 노력이 미흡했던 점, 외적 성장주의와 권위주의의 유혹에 빠졌던 점, 그리고 다른 종교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했던 점 등이다.

한국 천주교의 이런 과거사 반성에 대해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평가됐지만 만만치 않은 비판의 목소리도 등장했다.

가장 많이 지적된 점은 반성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게 서술돼 철저하게 참회하지 않고 그저 얼버무리려는 모습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천주교회의 고질적 문제인 남성중심적 편견에 대한 언급이 없고, 생태계 파괴에 대한 우려가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가 진정으로 참회하고자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견해가 적지 않게 제시됐다.

비판자들이 볼 때 이렇듯 교회가 불충분한 반성의 자세를 취한 까닭은 올해 3월 로마 교황청의 과거사 참회를 한국 천주교회가 그저 형식적으로 모방했을 뿐이며, 교회 자체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쇄신과 화해' 라는 문건 내용의 빈약성은 11월 20일 발표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21세기 한국기독교 신학선언' 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한장짜리 '쇄신과 화해' 에 비해 '신학선언' 은 10장 분량으로 여태까지 한국 개신교가 저지른 과오를 비교적 충실하게 반성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의 이번 참회를 단지 문건 내용의 차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쇄신과 화해' 가 천주교의 각 교구를 대표하는 주교회의 이름으로 결의됐기 때문이다.

개별 교회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개신교의 조직에 비해 천주교는 중앙집중적 권위 조직으로 짜여 있다.

따라서 개신교의 중앙기구가 사실 유명무실한 데 비해 천주교의 권력은 중앙을 향해 위계화돼 있고 주교회의는 천주교에서 권위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쇄신과 화해' 를 '신학선언' 과 같은 평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이미 천주교의 과거사 반성은 12월 3일의 참회미사를 통해 평신도들에게 전달됐으며, 어느 정도 구속력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의 내로라 하는 거대 개신교회 대부분의 신자와 목회자가 양적 팽창에 눈이 멀어 '신학선언' 의 내용에 코웃음을 칠 것으로 짐작되는 것과 달리 천주교는 이번 참회를 계기로 뒤늦게나마 본격적인 교회갱신의 실마리를 잡게 됐다고 보인다.

그래서 보수적인 주교회의를 설득하기 위해 참회 문건 본래의 예각이 많이 무뎌지기는 했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바람직한 변화 모습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12월 3일의 참회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보인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런 참회 정신을 어떻게 제대로 관철시키고 구체적인 실천 결과를 낳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유일신론적 종교가 지닌 미덕은 신자로 하여금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게 하며 신 앞에서 겸허해지는 마음으로 끊임없는 자기갱신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삶을 좇으려는 자세를 신앙의 모델로 삼는 천주교 신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 신의 말씀으로 채우려 한다.

"자신을 쇄신하고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 하려 한다" 라는 천주교의 이번 각오가 타오르는 신앙의 열정으로 계속 식지 않기를 기대한다.

장석만 <한국종교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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