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 뭘 남겼나] 김정탁 교수 '데리다를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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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건물짓는 일 못지않게 부수는 작업이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그것이 마치 과학의 쾌거이자 인간 정신의 위대한 승리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이것들을 해체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자크 데리다는 2000년의 서양철학 구조물을 해체하고 새 구조물을 짓고자 했다. 이것은 분명 엄청난 작업이지만 유(儒).불(佛).선(仙)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를 모티브로 삼음으로써 전 세계 지성을 놀라게 만든 훌륭한 설계도를 그려냈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을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규정했다. '로고스 중심주의'란 이성적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체계로서 로고스만이 모든 것의 으뜸 원인이자 궁극적이라는 믿음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중심이라는 것 또는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것을 배제하고서 이루어낸 폐쇄적 사고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양의 지적 전통은 수천년간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모두를 '타자'라는 주홍글씨로써 각인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근대에 들어 서양인들은 아시아.아프리카인을 야만시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사고방식.삶의 철학을 주입시키는 데 몰입하지 않았던가. 서양의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데리다가 도입했던 것이 바로 동양적 사유다. 서양의 전통적 언어는 낮과 밤,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과 같은 이항(二項) 대립 구조에서 출발한다. 이런 식의 이항대립적 표현은 대상이 단절되고 불연속적인 것처럼 보여 마치 실재도 구분된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들은 변화 과정.생성 과정의 한순간일 따름이다. 동녘의 새벽은 과연 밤일까 낮일까. 서양의 의사소통 사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낮을 오전과 오후로 구분하는 이항대립적 분화를 거듭해 왔다. 물론 그 분화의 끝은 0과 1로 구분되는 디지털이다.

결국 이런 의사소통관은 우리들의 주관적인 개념, 즉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민주와 반민주와 같은 주관적인 개념조차도 이항대립화시키고 있다. 이런 이항대립화는 결국 우리들을 상극의 논리에 빠뜨리고 만다. 이항대립적 표현은 'either or' 방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both all'로 상징되는 상생의 논리와 다른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극의 논리로써 서로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라고, 시민운동이라고, 노동 운동이라고까지 착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 사회에서 상극의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을까. 정치인.시민단체.기업인.노조.종교인? 물론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 근대화 과정에서 강요된 서양식 사고방식에 함몰된 바로 우리들이다. 데리다는 이런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통렬히 지적하고 며칠 전 타계했다.

김정탁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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