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선 땐 모든 게 닫히지만 포기하면 모든 기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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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김태호 경남지사는 “친박이나 친이 같은 개념은 타파해야 한다”며 “그런 개념이 깨지는 것이 한국 정치의 발전”이라고 말했다. 창원=송봉근 기자

경남도청 김태호(48) 지사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맞은편 벽면에 거꾸로 걸린 대한민국 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 위에는 ‘생각을 달리하면 미래가 보인다’란 글이 쓰여 있다. 이 지도에서 남해안은 대륙의 끝자락이 아니었다. 남해안이 태평양을 이고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모양새였다. 변방이 순식간에 태평양의 중심 항구가 됐다. 김 지사가 강조하는 역발상의 한 단면이다.그가 지난 25일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열고 차기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선 도지사 도전을 포기한 것이다. 김 지사에겐 연임 가능성이 높다는 평이 많았다. 그는 왜 불출마를 선언한 걸까.

김 지사는 불출마 기자회견에서 “경남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생각으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설명이 부족해 보였다. 이 때문에 이명박 정부 입각설이 나돌기도 했고, 대권을 꿈꾸는 것 아니냐는 관측 등이 꼬리를 물었다. 28일 오후 경남 창원시 도청 도지사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불출마 기자회견이 갑작스러웠다. 심경은.
“행복하다. 이렇게 편안할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정말 순수한 결단이었다.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든가, 유력한 경쟁자가 있었으면 출마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3선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닫혀 있지만 불출마를 하면 모든 기회가 열린다. 도지사 3선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변화의 중심에 있어야 오히려 많은 기회가 열린다. 개인적으로 에너지도 많이 소진됐다. 공부를 좀 해야겠다.”

-불출마 선언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크게 봐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만이 어떤 몫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부분이 있을 것 같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에 근무하다 ‘이제 거창으로 내려가야겠다, 바닥부터 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1997년 무렵이다. 도의원에 출마하려 했더니 당시 이강두 의원이 만류했다. 이 의원은 아버지 친구이자 제가 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 의원께서 ‘너무 이르다. 국회의원 공천을 받아 내려가야지 도의원으로 가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 다 말렸다. 그때 생각했다. 나에게는 내려갈 수 있는 용기와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다고. 결국 도의원에 당선됐고 거창군수도 할 수 있었다. 군수를 2년쯤 했을 때(2004년)다. 도지사 보궐선거가 있었다. 도지사에 도전한다니까 또 백이면 백, 만류하더라. 심지어 저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눈초리도 있었다.

남들이 뭐라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미미하지만 제가 가진 가능성과 콘텐트를 보여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도민들이 수용해 도지사가 됐다. 사실 3선에 도전하면 가능성이 커서 다소 편안하게 갈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을 것을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속도 쓰리다. 도지사에서 물러나면 당장 운전부터 내가 하고 다녀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 과정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 따르면 최근까지 불출마 기색이 전혀 없었다고 하던데.
“아마 그랬을 거다. 불출마 문제는 재선되면서부터 고민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잡고 상담하기도 어려웠고 그래서 전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에게도 이틀 전에 얘기했다.”

“좋아하는 정치인, 시각까지 같을 수 없어”

-불출마 전에 상의를 한 사람은 없나.
“안상근 정무부지사 정도가 알지 않을까 싶다.”(안 부지사는 그의 30년 지기이자 정치적 동지다.)

-2012년 대선을 위해 불출마 선언을 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아직 대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누구나 미래에 대한 포부나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국민의 신뢰나 믿음을 얻었을 때 그것도(대권도) 가능하다고 본다. 지금 대권을 생각하고 그런 것은 전혀 없다.”

-입각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청와대와 교감은 없었는가.
“전혀 없다. 정치는 수를 쓰거나 거래를 하면 그것 때문에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고 넘어진다. 그런 거 때문에 망한다. 교감설 같은 것은 그냥 설에 불과하다.”

-불출마와 관련해 청와대 관계자들을 만난 적은 없나.
“서울에서 시도지사 회의를 하면 정무수석 등을 만나 현안에 대해 상의하고 우리 도의 논리도 설명하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만난 적은 있지만 나의 정치적인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김 지사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는 가깝다고 본다. 박 전 대표를 좋아하고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친박이라고 분류하는 사람도 있던데.
“좋아하면 친박 아니냐. 정치적인 도의라는 게 있다. 나는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 도지사를 했다. 물론 경선을 통해 후보가 됐지만 말이다.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친박으로 분류된 계기가 있었다. 한 행사장에서 여성분들을 좀 치켜세우려고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 얘기를 했다. ‘독일에는 메르켈이 있고 미국에는 힐러리가 있다. 한국에도 박근혜가 있지 않느냐’고 한 것이다. 그랬더니 제가 드러내놓고 박 전 대표를 지지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지만 현직 도지사가 어떻게 당 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도울 수 있었겠나.”

-친이·친박 등 당내 계파에 대한 생각은.
“어떤 정치인을 좋아하고 따를 수는 있지만 정치적인 시각이 같을 수는 없다. 친박이니까, 친이니까 무조건 따라하는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박이나 친이 같은 개념은 타파해야 한다. 그런 개념이 깨지는 것이 한국 정치 발전의 출발이다. 사실 계파에 연연해 공천을 받아야 하는 방식도 문제다. 그런 공천 방식을 왜 못 깨는지 모르겠다. 제도적 변화가 있어야 국민이 ‘정치권이 나아지는구나’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계파 눈치 보기 정치가 결과적으로 난장판 국회를 만든다.”

-박 전 대표와의 인연은.
“도지사가 되고 나서야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경선에서 박 전 대표가 잘되기를 바란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문제까지는 다 동의할 수 없지 않느냐.”

-박 전 대표와 최근 통화한 적은 없나.
“연초에 인사차 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메모를 남겼는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 불출마에 대한) 결단은 누구하고 상의하고 그럴 문제가 아니다.”

-세종시 문제에 대해 견해는.
“박 전 대표는 세종시 문제에 있어 신뢰가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지도자들의 가치와 신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가 당내 싸움이나 분열로 가는 것에 대해 국민이 우려한다. 집안싸움을 하다 국격 상승의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 말이다. 이 대통령은 더 이상 표가 필요한 분도 아니고 세종시는 이 대통령의 임기와도 관련이 없다. 대통령에게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정부의 수정안을 놓고 더 이상 갈등 양상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수정안이 잘 추진돼야 한다.”

YS 오른팔 김동영 전 장관에게 정치 배워

김 지사는 서른여섯에 도의원, 마흔에 거창군수, 마흔둘에 도지사가 됐다. 당시 최연소 도지사, 최연소 군수였다. 그는 소장수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소 여물을 줘야 하는데 TV를 보느라 깜빡 잊은 적이 있었다. 당시 부친이 “소죽도 제대로 못 주는 이 빌어먹을 놈아, 너는 공직은 절대 안 된다. 백성 굶기기 좋을 놈이다”라며 호통을 쳤다. 그는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것도 부친의 영향이 컸다. 김 지사는 서울대 재학 시절 부친의 죽마고우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던 김동영 전 정무장관 집에서 지내며 정치의 맛을 봤다. 정치권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95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김 지사는 서울대 농업교육과를 졸업하고 그 대학에서 교육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젊은 시절 “한국의 케네디가 되겠다”고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건 내가 직접 하고 다닌 얘기는 아니다. 주위에서 제가 최연소 타이틀을 달고 다니다 보니 덕담을 하면서 나온 얘기다.”

-정치인으로서 김 지사의 경쟁력은.
“도전이다. 그 도전은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시대가 바라는 민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 도전이 지금은 무모하게 보이더라도 민심의 바탕 위에서 뭔가 설렘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첫 선거에 나갔을 때 ‘천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 하나 들고 시작했다고 들었다.
“처음부터 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도의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내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 같았으면 안 했겠지만 당시 민심의 틈새 기류 같은 것을 봤다.”

-인생에서 시련이 있었다면.
“저를 처음 보면 도시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란 것으로 아는 분이 많다. 근데 정말 시작은 바닥에서부터 했다. 어릴 때는 쇠꼴을 뜯다 손이 다 망가진 상태로 살았고 똥통을 메고 다녔다고 하면 잘 믿지를 않더라. 봉천동의 비가 새는 전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이었다.”

창원=신용호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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