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가토씨의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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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토 고이치(加藤紘一.61)일본자민당 전간사장은 몇년 전부터 '확실한 총리감' 으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재작년부터 자민당 내 제2 파벌인 가토파(옛 미야자와파)의 회장직을 맡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원래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1972년 부친의 선거구를 이어받아 중의원에 진출했다.

지난 95~96년은 한.일관계도 그랬지만 가토와 김영삼(金泳三)당시 대통령의 사이도 '악연(惡緣)' 의 연속이었다.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이던 가토는 북.일수교를 염두에 두고 북한에 쌀을 제공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에 金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어깨 너머로 북한과 거래한다" 고 비판했다.

한.일간 '감정외교' 의 시작이었다. 95년 9월 金대통령은 한.일 민간포럼 참석차 방한(訪韓)한 가토 정조회장 일행의 인사를 받는 자리에서 일부러 가토만 홀대하는 방법으로 반감을 표현했다.

당시 가토의 바로 옆에 서있던 한 일본 언론인은 "대통령이 가토와 악수할 차례가 됐는 데도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은 물론 얼굴마저 외면해 깜짝 놀랐다" 고 술회했다.

95년 11월에는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총무청장관의 "일본은 식민지지배 시절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 는 발언으로 한국 내 반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자민당 간사장이던 가토는 그러나 "한국이 문제를 위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고 반박했다.

그 직후 金대통령은 장쩌민(江澤民)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이번에야말로 (일본의)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 고 다짐했는데, 발언내용보다 '버르장머리' 라는 표현 때문에 일본 조야에서 반발이 거세졌다.

해를 넘긴 96년 2월 가토는 고향(야마가타현)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 金대통령을 '김영삼이라고 하는 대통령' 이라고 부르는 상식밖의 외교적 결례를 저질렀다.

계속되는 감정싸움에 양국 외교부가 모두 노심초사한 것은 물론이다. 이같은 갈등은 97년 1월 가토가 한국을 방문해 金대통령과 면담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차차 가라앉았다.

그런 가토가 차기 일본총리가 되기 위해 '쿠데타' 를 일으켰다는 소식이다. 이달말 야당이 제출할 내각불신임안에 동조함으로써 모리 요시로(森喜朗)현 내각을 무너뜨리고 총리직을 노린다는 복안이다.

쿠데타의 성공 여부와는 별도로 지난날 '감정외교' 의 폐해를 교훈삼아 한.일우호에도 한층 노력해 주었으면 한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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