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 발목잡힌 월스트리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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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대통령선거의 후유증이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면서 전세계 금융시장이 얼어붙었다.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는 금융시장의 속성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선거결과가 빨리 확정돼야 그에 걸맞게 대처할텐데 최종 당선자 발표는 17일로 늦춰졌고, 그 이후에도 법적 분쟁.정국 동요 등 숱한 불안요인이 도사리고 있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9일(현지시간) 뉴욕증시의 모습은 이같은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를 여실히 보여줬다.

오전장 내내 약보합세를 유지하던 이날 장은 고어 후보측의 선대위원장인 윌리엄 데일리가 오후 2시쯤 TV에 출연, "플로리다주 4개 카운티의 검표를 수작업으로 하도록 요청할 방침이며, 개표와 관련해 석연치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법적 소송도 불사하겠다" 고 말하자 바로 곤두박질쳤다.

그의 발언 5분 만에 다우지수는 2백포인트, 나스닥지수는 1백40포인트 급락했다.

부시 후보의 당선을 기대했던 투자자들은 당황한 나머지 이른바 '부시주' 로 분류되는 제약.담배.석유 관련 주식까지 대거 팔아치웠다.

이후 낙폭이 줄기는 했지만 이날 시장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불확실성이 계속 고조될 경우 주가는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채권시장의 경우 고어 후보가 재검표 과정에서 표차를 줄여가자 채권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다가 다시 정국 전반에 대한 불안감이 짙어지면서 하락세로 돌아섰다.

메릴린치의 수석 애널리스트인 크리스 캘리즈는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투자자들은 주식을 결코 사들이지 않을 것" 이라며 "특히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가장 안전한 투자처로 여겨지던 뉴욕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대거 이탈할 가능성도 있다" 고 말했다.

문제는 이 여파가 전세계 금융시장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달러화에 대해 약세를 면치 못하던 유로화는 9일 들어 미 대선 판세가 혼미해진 데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시장개입까지 겹치면서 하락세로 반전했다.

9일 영국.독일.프랑스 등 유럽증시가 약 1%, 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 등 중남미 증시가 약 2%의 하락세를 기록한 데 이어 10일에는 아시아 증시도 동반 하락했다.

유가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향후 정세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거래 자체가 위축된 가운데 동절기라는 계절적 요인과 12일 열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각료회담에서 변수가 돌출할 가능성까지 등이 겹쳐 3대 기준유가가 일제히 상승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아직까진 좀더 지켜보자는 관망세가 우세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미국발 금융위기' 가 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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