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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빠도, 아들도 딸도 ‘농구는 내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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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광재(左), 이유진(右)

남녀 프로농구에 잘나가는 ‘순혈 농구 가족’이 있다. 동부의 슈터 이광재(26·1m87㎝)와 삼성생명의 센터 이유진(20·1m83㎝) 남매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부모도 농구선수 출신이다. 아버지 이왕돈(53)씨는 삼성전자 센터로 활약했고, 어머니 홍혜란(53)씨는 태평양화학과 국가대표팀 가드로 이름을 날렸다. 지난달 31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만난 남매는 시즌 중이라서 그런지 “정말 오랜만에 본다”며 웃었다. 농구라는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81년 겨울과 91년 여름=이왕돈씨와 홍혜란씨는 81년 말 처음 만났다. 이씨가 절친한 친구 진효준(전 고려대 감독)에게 “태릉선수촌에 들어가거든 홍혜란이랑 다리 좀 놓아달라”고 조른 끝에 성사된 자리였다. 홍씨는 당시 ‘얼짱 슈터’로 타 종목 선수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했지만 콧대 높기로도 유명했다. 오랫동안 홍씨를 마음에 두고 있던 이씨는 특유의 입담을 앞세워 마음을 사로잡았다.

10년 뒤인 91년 6월. 이씨는 삼성전자 농구단 직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팀이 필리핀 전지훈련을 하던 어느 날 오전 코칭스태프 회의 도중 전창진 주무(현 KT 감독)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왕돈이 형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이씨와 룸메이트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씨는 의식을 잃은 채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뇌출혈이었다. 이씨는 이후 거동이 불편해져 지금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이씨가 쓰러졌을 때 이광재가 일곱 살, 이유진은 한 살이었다.

◆농구는 내 운명=이왕돈·홍혜란 부부의 농구 유전자는 아들과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수 이왕돈과 홍혜란을 기억하는 이들은 “광재는 엄마를, 유진이는 아빠를 빼닮았다”고 말한다. 이광재는 어머니가 그랬듯 ‘얼짱 슈터’로 인기가 높다. 지난해에는 팬 투표에서 ‘프로농구 F4(꽃미남 4총사)’로 선정됐다. 농구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광재는 이번 시즌 팀의 42경기에 모두 출장해 평균 11점을 기록 중이다.

이들은 농구를 하면서 늘 부모의 흔적을 느낀다. 2007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이광재를 뽑은 사람은 전창진 당시 동부 감독이었고, 그를 유난히 혹독하게 다뤘다. 이광재는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선배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견디냐’며 놀라더라”고 말했다. 성인완 동부 단장은 “전 감독이 광재에게 일부러 더 독하게 한 것 같아 애틋한 마음도 들었다”면서 “광재는 아버지의 투병으로 어릴 때부터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강해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고 전했다. 이유진은 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생명에 지명됐다. 아버지와 딸이 대를 이어 삼성에서 뛰게 된 셈이다.

어머니 홍씨는 남매에게 “다치지 말라”고 응원하고, 아버지 이씨는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준다. 이광재는 “농구장에서 처음 뵙는 분이 ‘네가 왕돈이 아들이냐. 경기 잘 보고 있다’고 하실 때가 많다. 부담도 되지만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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