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언론서 '민초의 소리' 생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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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 대선의 특징 중 하나는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서든 반영하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대표적 공영방송인 PBS와 NPR는 선거기간 내내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줬다. 쉽게 말해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전국 유권자들은 이 두 방송에 대고 후보들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마음껏 쏟아냈다.

표지상정(票之常情)이라고나 할까. PBS와 NPR에 나온 얘기들을 살펴 보면 미국 민주주의의 '생기' 가 그대로 전달된다.

유권자 마티 모런은 "우리는 외과의사처럼 대통령을 골라야 한다" 고 외과의사론을 폈다. "좋은 품성을 지닌 멋진 의사라면 평소 참 좋다. 하지만 막상 수술대 위에 누우면 나는 가장 능력있는 의사를 고른다. 그렇다면 부시는 아니다" 는 주장이다.

제임스 리온스란 사람은 더 신랄하게 "부시는 인질(hostage)이란 단어를 적대적(hostile)이라는 단어와 혼동하더라. 미 대통령은 정확하게 표현하는 '뛰어난 전달자' 여야 한다. 대통령이 그 두 단어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황당하다" 고 비꼬았다.

부시측이 애용하는 '두뇌 차용론' 도 비판대에 올랐다. 에릭 매드슨은 "부시 지지자들은 부시가 좋은 참모들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참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참모들과 논쟁할 능력이 없으면 참모들이 뒤에서 어떤 짓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내느냐" 고 주장했다.

부시의 탈선전력도 주요 비판 대상 중 하나다.

비키 골드슈라저는 "부시가 10여년간 알콜 중독자였지만 만 40세가 되는 날 술을 끊었다고 한다. 그건 자랑이 아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39세에 죽었는데 그 나이에 벌써 아주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 고 했다.

하지만 부시파들은 그런 비판에 끄떡 않는다.

리치 윌리엄스는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결한 품성인데 그게 고어에겐 없다. TV를 잠깐 끄고 당신의 영혼이 안내하는 대로 투표하라" 고 일갈했다.

고어를 괴롭혀온 빌 클린턴 대통령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은 아직도 많은 국민들에게 생생한 것 같다.

닐 페인은 "클린턴은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고어는 그런 거짓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한번도 안했다.

그는 표를 얻기 위해 클린턴과 차별화를 원하고 있지만 클린턴이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면서 그게 가능하냐" 고 비아냥거렸다.

마크 프랭크포드는 "나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고 수많은 정책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미국은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다. 현재 대통령과 부통령은 그때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고 말했다.

마빈 올슨이란 유권자는 "고어가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다. 그때 잡혔으면 중죄로 처벌받았을 텐데 나는 법을 어긴 사람을 대통령으로 찍을 수 없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

공영방송의 민초란엔 고어와 부시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제3그룹의 심정도 생생히 드러난다.

마크 타케노는 지지율 5% 정도인 녹색당의 랠프 네이더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그가 소수파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 듯 "왜 고어는 당선되면 네이더를 각료에 임명하겠다고 공개 선언하지 않느냐. 그러면 고민없이 고어를 찍을 텐데…" 라고 안타까워 했다.

T K 윌슨이란 사람의 갈등은 보다 구체적이다.

"나는 네이더를 찍고 싶다.하지만 1980년이 생각난다. 그때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앤더슨을 찍었더니 성향이 비슷한 카터는 떨어지고 원치 않던 레이건이 당선됐다. 그래서 올해는 내키지는 않지만 고어를 찍게 될 것 같다. " 기성정치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이익단체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았다. 그 당에서 나온 후보들은 이익단체에 결정적으로 해로운 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다" 는 주장들이다.

유권자들이 대통령후보들을 자유롭게 비난하거나 지지하고, 또 이를 공영방송에서 방송해 주는 미국 사회. 이게 바로 미국 민주주의의 힘인지도 모른다.

워싱턴=김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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